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후락 (문단 편집) === 중앙정보부장 시절 === 1970년 12월 제6대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여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가장 큰 배경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앞세운 야당([[신민당(1967년)|신민당]])의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에 "남산골 샌님" 얘기나 듣던 [[김계원]] 대신 정치 공작과 막후 술수에 능했던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힘으로써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락은 정치 공작의 달인답게 [[검찰]], [[경찰]], [[지방자치단체]], [[국군기무사령부|육군보안사령부]] 등 관권 조직을 총동원하여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막후에서 관리하며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1960 ~ 197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 [[정치]]의 상수(常數)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중앙정보부와 접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야당 당사, [[언론]]사, 주요 정부 기관, [[대학]] 등에 상주하면서 정보 활동을 하기도 했다.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며, 이들의 선거 개입을 총괄하는 것은 중앙정보부였다.][* 물론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관변 조직을 총동원하고 정부와 여당이 당시 금액으로 무려 600억~700억이라는 거금을 선거에 쏟아부었음에도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을 겨우 이기는 데 그쳤다. 박정희는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뿐이냐"고 주변을 닥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김대중의 선거 전략가 참모 [[엄창록]]을 잠시 며칠 동안 [[실종]]되게 하기도 했다. 초대 김종필부터 5대 김계원까지 역대 전임 중앙정보부장들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다.]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당시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의 해임 결의안을 저지시키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항명한 여당 국회의원들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하여 고문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을 [[10.2 항명 파동]]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는 박정희의 처남이자 [[영부인]] [[육영수]]의 친오빠인 [[육인수]]도 있었고,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 [[김성곤]]도 있었으며, 특히 김성곤은 고문 [[후유증]]으로 4년 뒤 사망했다.]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10월 유신을 작업했던 곳은 [[궁정동]] 안가였으며, 작업 [[암호]]명은 '풍년 사업'.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는 나중에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 이 때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 바로 [[김기춘]]이다.[* 출처 :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18756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