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역사 (문단 편집) ==== 팔렘방 ==== 수마트라 동부의 [[팔렘방]] 지역은 1347년 마자파힛의 원정으로 마자파힛에 복속되었으나, 14세기 말 여러 차례의 반마자파힛 반란이 발생하며 마자파힛의 통제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1397년 무렵 마자파힛에 의해 팔렘방의 영주 가문이 단절되자, 팔렘방에 거주하던 [[광둥성|광둥]] 난하이(南海) 출신 화인 양도명(梁道明)이 다른 화인 수천 명의 지지를 얻고 팔렘방의 왕으로 추대되어 독자적인 반마자파힛 세력을 구축하였다. 1405년, 세력이 공고해진 양도명은 팔렘방의 지배자로 인정받기 위해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명나라]]의 [[영락제]] 조정으로 입조하러 갔다. 양도명은 자리를 비우며 자신을 따르는 광둥 출신 중국계 무슬림 시진경(施進卿)에게 세력의 통솔을 위임하였고, 양도명은 입조하여 답례를 받고 팔렘방 왕으로 명나라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양도명은 팔렘방으로 귀환하지 않고, 광둥 지역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양도명이 귀환하지 않자, 양도명이 남겨둔 시진경은 자연히 팔렘방에서 양도명을 따르던 화인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런데 1405–1407년, 1400년 무렵부터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인 해적 진조의(陳祖義)가 팔렘방을 공격하였다. 진조의는 선단 10여 척에 수하 해적 5천 명을 거느리는 대세력의 우두머리였고, 팔렘방뿐 아니라 말라카 해협의 여러 도시를 공격, 약탈하던 차였다. 시진경은 자력으로 도시를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 지역을 드나들던 [[정화(명나라)|정화]]의 선단에 구원을 요청했다. 1407년 정화 함대가 진조의 함대를 물리치고 진조의를 [[난징]]으로 압송해 처형함으로써 팔렘방은 해방되었다. 시진경은 1407년 사위를 [[베이징]]으로 보내 조공했고, 영락제는 시진경을 그대로 명의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하여 시진경이 공식적인 팔렘방 영주가 됨으로써 팔렘방은 잠시 명의 간접 지배 아래 놓였다. 시진경 사후 영주 승계권 문제에 개입하는 등 정화 함대는 팔렘방의 지배권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1421년 시진경이 사망하자 시진경의 아들 시제손(施濟孫)과 시진경의 맏딸 시대랑(施大娘)이 차기 영주 승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는데, 정화 함대는 시제손을 지지하여 결국 새로운 선위사로 시제손이 취임하게 되었다. 밀려난 시대랑은 1440년대에 자바 동부의 [[그레식]]으로 가서 상업 활동과 이슬람 포교를 수행하였으며, 마자파힛 산하 그레식의 [[샤반다르]](شهبندر, Shahbandar, 항구 총괄 관리관)로 1458년부터 1478년 사망[* 1483년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때까지 일하였다. 시대랑은 현지에서 냐이 그데 피나티(Nyai Gede Pinatih)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시대랑이 관리하는 상선은 발리, 믈라카, 크메르 지역까지 왕래하였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9인의 왈리]](Wali Sanga) 중 수난 기리(Sunan Giri)는 시대랑이 입양하여 기른 아이였다고 한다. (Reid 2017, 363-379)], 정화 함대가 물러간 후 팔렘방은 자연스럽게 마자파힛의 산하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팔렘방은 마자파힛이 붕괴되어 가자 [[인도네시아/역사#드막 술탄국|드막 술탄국]]에 속하였다가, 드막이 붕괴된 후 파장 왕국이 성립하자, 구 드막의 귀족 그딩 수로(Geding Suro)가 추종 세력을 거느리고 팔렘방으로 도피하여 파장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독립 정권을 세웠다. 수마트라의 요충지로서 팔렘방의 경제적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여 팔렘방은 17세기에도 상당히 번성하였는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이를 포착하여 팔렘방에 진출하고 1619년에 상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642년 공식적으로 동인도 회사가 팔렘방의 후추 교역 독점권을 획득한 후 점차 지역의 경제를 지배하려는 동인도 회사와 토착 세력 간 긴장이 팽팽해져 갔고, 마침내 1657년 팔렘방에서 네덜란드 선박이 공격받자 동인도 회사는 징벌 원정을 개시하여 1659년 팔렘방을 점령하고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이 와중에 16세기에 그딩 수로가 지은 팔렘방의 쿠토 가왕 궁(Keraton Kuto Gawang)도 파괴되었다. 팔렘방의 수수후난 압두라만(Sri Susuhunan Abdurrahman, 재위 1659–1706)은 파괴된 쿠토 가왕 궁을 버리고 새 궁전 브링인 장굿 궁(Keraton Beringin Janggut)을 지었다. 수수후난 압두라만이 1675년부터 공식적으로 기존의 군주 명칭 '수수후난'을 버리고 술탄위를 칭함으로써 팔렘방 술탄국(Kesultanan Palembang, 1675–1823)이 창건되었다. 팔렘방 술탄국은 기본적으로 드막의 파생 세력으로 출발하였으므로 귀족들이 [[자바어]]를 궁정어로 사용했고 자바 문화가 고급 문화로 향유되었으나, 동시에 무역 국가로서 [[말레이어]]와 말레이 문화에도 개방적이어서 독특한 혼성 문화를 창달하였다. 18세기 초에는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에서 [[부기스인]]의 세력이 강성해져 [[조호르 술탄국]], [[아체 술탄국]] 등에서 집권에 성공하였고, 팔렘방 술탄국에도 점차 위협이 되었다. 이 시기에 팔렘방 술탄 마뭇 바다루딘 1세(Mahmud Badaruddin I, 재위 1724–1757)는 17세기 말부터 팔렘방 술탄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당시 부기스인의 세력권에 있던 [[주석(원소)|주석]]의 주요 산지 [[방카블리퉁 제도]]를 점령하고 채광 노동자로 화인들을 고용하였으며, 1731년 [[방카섬]]에서 발생한 부기스인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술탄은 수마트라 남부 [[람풍]](툴랑바왕) 지역의 토착 영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이 지역으로도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여 기존에 지역을 지배하던 [[반튼 술탄국]]과 신경전을 벌였다. 팔렘방과 반튼 간의 대립은 1738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중재로 반튼의 람풍 영유권이 그대로 인정되는 방식으로 종결되었다. 18세기 말, 무하맛 바하우딘(Muhammad Bahauddin, 재위 1776–1803)의 치세에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쿠토 브삭 궁(Keraton Kuto Besak)이 신축되었다. 팔렘방 술탄국이 방카블리퉁 제도를 차지한 후, 18세기에는 팔렘방의 주요 교역품으로 주석이 대두되어 점차 기존의 [[후추]]를 대체해 갔다. 이에 따라 주석의 경제적 가치에 눈독을 들이던 네덜란드와 영국 세력이 팔렘방의 이권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 [[마뭇 바다루딘 2세]](Mahmud Badaruddin II, 재위 1804–1812, 1813, 1818–1821)의 치세에 이는 본격화되었고, 1819년 네덜란드가 팔렘방의 복속을 목적으로 침공하였으나 팔렘방군에 일단 격퇴되었다. 네덜란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1821년 다시 팔렘방을 침공하여 1821년 6월 25일 점령했다. 네덜란드에 반항하였던 마뭇 바다루딘 2세는 폐위되고 바타비아로 압송되었다가 [[트르나테섬]]으로 유배되었다. 팔렘방 술탄위는 아맛 나자무딘 3세(Ahmad Najamuddin III, 재위 1821–1823)가 잠시 계승하였으나 결국 1823년 술탄국이 해체되었고, 팔렘방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편입되었다. 술탄가는 유지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도 명목상 팔렘방 술탄직은 이어져 내려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