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세이 (문단 편집) == 종말 == 고시라카와 사후 요리토모를 [[정이대장군|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에 임명하는 안이 관철되어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조정의 동국 지배권이 상실된 이후 조정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1221년]] '조큐의 난'으로 고토바 상황이 호조 가문에 의해 유폐되고, 황가와 귀족들이 장원의 상당수를 잃게 되면서 확실해졌다. 이후 조정의 약화와 함께 인의 권력도 크게 약화되어 지난날과 같은 치천의 군의 위세는 갖지 못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바쿠후(幕府)기 교토에 설치된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통한 호조 가문의 정치 개입 속에서 인세이는 황족 내 황위다툼과 연계되어 행해지는 경우가 늘어났다. [[13세기]] 중반 이후 황통이 '지묘인토(持明院統)'와 '다이가쿠지토(大覚寺統)'로 분열되었고, 막부는 황통의 교차 세습을 권유하여 양통의 황족들이 번갈아가며 황위를 잇게 되었으며, 인이 황위의 계승을 제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333년]] [[고다이고 덴노]]의 [[겐무 신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으나 북조의 지묘인토가 황통을 독점하게 되면서 부활하였다. [[17세기]] 초 [[에도 막부]] 시대에도 [[고미즈노오 덴노]]가 인세이를 행하였으며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이렇듯 인세이는 셋칸직과 더불어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어지기는 했지만 막부 시대의 상황들은 시라카와-도바와 같은 치천의 군의 권력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고토바 상황이 설치했던 '서면의 무사(西面の武士)'는 철폐되었고, 북면의 무사(北面の武士)도 크게 축소되어 소수의 경호집단 수준으로 전락하였다가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를 지나며 천황의 권력 자체가 없는 수준이 되자 [[사문화]]되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