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세이 (문단 편집) === 인세이의 절정기, [[시라카와 덴노|시라카와 법황]]의 치세 === [include(틀:일본의 역사)] 사실상 인세이의 전형은 [[시라카와 덴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시라카와 덴노는 [[1087년]]에 불과 8살밖에 안 된 아들 타루히토 친왕(善仁親王)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면서 인세이를 시작했다. 이렇게 즉위한 [[호리카와 덴노]](掘河天皇)가 죽고, 5살밖에 안 된 호리카와 덴노의 아들이 즉위하여 [[도바 덴노]](鳥羽天皇)가 되면서 시라카와 상황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아예 '''모든 정사는 시라카와 상황이 좌지우지하고''' 천황은 말만 천황일 뿐 사실상 황태자나 다름없는 기묘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황태손이다.] 시라카와 덴노가 처음부터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들에게 양위한 건 아니었다. 원래 양위한 이유는 강력한 차기 황위계승권자인 동생들을 우려해 동생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거였다. 호리카와 덴노는 칸파쿠인 후지와라노 모로미치(藤原師通)와 상의하며 정사를 봐서 시라카와 상황이 멍때리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는 고산조 덴노가 셋칸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는 했으나 아직은 조정에서 셋칸 정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탓에 시라카와 상황에게는 셋칸케에만 쏠리는 국정 운영에 필요한 정보력과 영향력 및 상황으로서 권력을 행사할 마딴한 조직과 기반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1099년]] 때마침 칸파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가 사망하여[* 모로미치의 급서에 대해서 <헤이케모노가타리>는 당시 지샤(절과 신사) 세력의 강소에 대한 강경 진압을 단행했던 모로미치가 신불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설을 싣고 있다.] 시라카와 상황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모로미치의 아들 후지와라노 타다자네(藤原忠實)는 당시 나이가 어렸고, 아버지만큼의 정치력은 없었기에 모로미치에게 상의해서 정치를 하던 호리카와 덴노는 이제 아버지에게 물어서 정치를 해야 했다. 게다가 [[1107년]] 호리카와 덴노가 갑자기 사망하고, 5세이던 태자 무네히토 친왕(宗仁親王)이 즉위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시라카와 상황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이다. 더불어 후지와라의 셋칸을 임명하던 후지와라 출신의 [[황태후]]가 부재하였던 상황은 황실 최고 어른의 자리를 상황이 차지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이후 황태후를 대신해 상황이 셋칸의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황실 어른으로서 천황의 계승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특히 천황 계승 문제는 장자 계승이 확립되지 않은 채 주로 외가의 권세에 따라 계승이 결정되어 불안정했던 황통 계승 문제를 염려하던 천황들이 후대로도 인세이를 행하는 주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가마쿠라 시기 황통의 분화에도 영향을 미쳐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 시대]]를 여는 계기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이후 시라카와 상황은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인노고쇼(院御所)인 [[교토]] 동북부 시라카와 호쿠덴(白河北殿)에 자리잡은 그는 권력의 수족으로 외척이나 대귀족들 대신 중하류 귀족들과 지방 고쿠시(國司, 국사) 출신들 및 무가 세력을 기용해 그들 중심으로 측근정치를 행하였다. 이들은 인에 설치된 원청에서 근신(近臣)으로서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인은 조정에도 근신들을 보냈고, '인젠(院宣)'이나 '인쵸쿠다시부미(院廳下文)' 같은 문서를 통해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조정]]을 압박했다. 또한 [[경호]] 및 직권 무력으로서 '북면의 무사(北面の武士-호쿠멘노부시)'를 설치하여 측근들과 각지의 [[미나모토|겐지]], [[타이라|헤이시]]와 같은 여러 무사 씨족들을 기용하였다. 이들은 인의 경호 및 직접적인 무력으로서 활동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유칸(融観)'이란 법명을 받은 시라카와 법황은 불교계와 유착을 강화했고, 젊은 셋쇼를 직접 임명하며, 도중 그 직권을 2번이나 정지시키면서 기를 꺾는 등 후지와라 셋칸케를 견제하였다. 또한 방계 황족들을 출가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후지와라 가문이 황위 계승에 간섭하지 못하게 해 자신의 자손들이 외척의 도움 없이 황통을 이어가게끔 조치하였다. 이런 권세 덕에 법황은 '치천의 군(治天の君)'이라 불리며 위세를 떨쳤다. 이때 시라카와인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 가지, 즉 '천하삼불여의(天下三不如意)'에 대해 말했다고 하는데, 교토 인근 카모가와(賀茂川)의 물, [[쌍륙]]의 주사위(의 눈금), [[승병]]의 문제[* 히에이잔(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의 승병이 특히 골칫거리였다.]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는 것이다.[*출전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이는 뒤집어 말하면 자연과 운, 당시 강성하여 강소(强訴)를 일삼던 승병들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이 전제(專制)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승병은 무사들을 동원해 억제하였기에 상황으로서 지난날 셋칸의 권력 이상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시라카와 법황은 셋칸케를 비롯한 귀족들의 장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셋칸케의 전횡을 억제하기도 했지만, 점차 인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조정이 무력화되고, 정치가 자의적으로 행해져 조정의 권위가 떨어지는 폐해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에 심취했던 인이 사원들에 장원을 기진하거나 새로운 사원을 세우면서 재정 지출이 증가하고, 장원 개혁이 약화되는 폐해를 생겨났다. 더불어 후지와라 셋칸케와 밀접했던 무사씨족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세이와 덴노]](淸和天皇)로부터 사성(賜姓)된 방계 자손이었던 '세이와 겐지'(淸和源氏)'의 일가로 카와치 국(河内國)을 근거로 했었음.]'를 경계하여, 겐지와 경쟁하던 무사씨족이었던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간무 덴노]](桓武天皇)로부터 사성(賜姓)된 방계 자손인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의 일가로 이세 국(伊勢國)를 근거로 했었음.]'를 중용했는데, 그 비호 아래 [[헤이케|타이라]] 가문이 인의 무장세력으로서 복무하면서 지방의 문제나 승병들의 강소 등을 막고, [[상업]]과 장원에서 쌓은 부를 인에 바치면서 성장하여 무가정권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일족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조부 타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 때부터 북면의 무사로서 시라카와인을 섬기면서 법황의 총애를 얻고, 그를 통해 여러 이권과 지위를 얻으면서 성장하였다. 마사모리의 아들 타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는 시라카와-도바 법황을 섬기면서 장원을 늘리고, 송과의 교역을 확대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충, 이를 기반으로 [[사병]] 및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을 늘리면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런 세력을 가지고 인을 뒷받침하여 그 공로로 조정에 출사하기에 이르렀으며, 아들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권력을 휘두를 물적, 인적 기반을 마련해 놓는다.] 당시까지는 반석과 같던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였으나 위와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후대에 분란의 여지를 남겼으며, 여기에다 사적으로 호색했던 면이[* 하술되는 손자며느리와의 풍문부터, 측근이나 북면의 무사 중 몇몇이 남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추문을 불러일으켜 이후 황가의 내분, 즉 '[[호겐의 난]]'을 초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