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세이 (문단 편집) ==== [[도바 덴노|도바 상황]]의 인세이 ==== 인세이는 천황을 공기화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인세이의 가장 큰 문제는, 인세이를 하는 상황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 자연히 권력에서 소외되는 천황에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게 되고, 천황이 상황에게 맞서서 권력을 쟁탈하려 하게 되면 결국 [[내전]]이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게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129년]] 시라카와 법황의 사후에 일어났다. [[1123년]] 시라카와 법황은 직접 키운 손자 [[도바 덴노]]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도바 덴노의 장남 [[스토쿠 덴노]]를 세우고 난 뒤에 죽게 되었다. 문제는 도바 덴노가 스토쿠 덴노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도바 덴노가 처음부터 장남을 싫어했던 건 아니고, 강제로 양위하게 된 것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이 사정에 대해선 [[스토쿠 덴노]] 문서 참고. 시라카와 법황이 세상을 떠난 뒤, 도바 상황은 인세이를 행하여 율령을 벗어난 자의적 정치가 이어졌다. 특히 도바 상황은 장원의 국령지 회수보다 자신의 장원 확보에 열을 올리면서 인(院)이 막대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도바 시기 장원으로 인한 분란과 소요가 끊이질 않게 되었다. 상황이 사적으로 장원을 늘리는 행위는 황실의 신망을 떨어뜨렸으며, 국고를 감소시켰다. 이런 경향이 확대되어 [[타이라]] 같은 무사 가문이나 귀족 가문들, 지방의 권세가들까지 토지를 겸병하게 되었고, 이들 세력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서 국고가 악화되고, 민심이 흔들렸다.[* 이러한 장원의 남설은 [[고시라카와 덴노]] 즉위 이후 '호겐신제(保元新制)'의 반포와 시행을 통해 천황의 장원 지정권 확립 및 장원 정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도바 상황은 긁어모은 막대한 영지의 대다수를 총애하던 [[후지와라노 도쿠시]]에게 물려주었고, 이것이 도바 상황과 도쿠시의 딸이자 고시라카와 덴노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의 양모였던 하치조인 쇼코 내친왕(八条院 暲子 内親王)에게 상속되어 훗날 모치히토왕의 거병의 기반이 되기도 하는 등 황실 내 내분과 황권의 약화를 부추겼다.] 여기에다 황실의 내분, 계속되는 실정은 황실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이미 [[고레이제이 덴노]] 이전까지 거슬러가는 지방의 분열과 불복종은 심화되었다. 동북방의 오슈(奥州)에서는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지방 [[관직]]과 관위를 세습하면서 사설 장원 및 북방과의 교역 및 사금 채취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으로 교토와 맞먹는 규모의 [[히라이즈미]]를 건설, 반독립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러나 황실과 대귀족들의 장원 및 국유지 역시 상당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 지방통치형식은 중앙이 조세와 장원의 공물만 징수하고, 지방 권력은 고쿠시(国司, 국사)와 지방 세력에게 위임하는 형식이었는데 오슈 후지와라씨는 유독 강성하여 오슈의 지방세력을 규합, 통제하는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장원들은 소유 무사들에 의해 봉건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이 이들 토지 소유 무사 간의 토지 분쟁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하면서 이를 중재하는 무사 세력의 힘이 성장하였다.[* 10세기 간토에서 발생했던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도 그 발단은 친족간 토지 분쟁이었다.] '세이와 겐지'와 '간무 헤이시'를 비롯한 지방의 여러 무사들의 대두는 이를 바탕으로 지방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형성한 것을 그 기반으로 하였다. 한편 도바 상황은 총애하던 [[후지와라노 도쿠시]]가 황자를 낳자 이 아들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려고 [[스토쿠 덴노]]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결국 [[1142년]] 스토쿠 덴노는 아버지의 강요로 2살짜리 동생인 나리히토 친왕(体仁親王)을 양자로 들여서 양위를 하게 되었고, [[코노에 덴노]]가 즉위하였다. '신인(新院)'으로 불리게 된 스토쿠 상황은 원래대로였다면 도바 상황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서 인세이를 할 수 있었으나, 인세이는 덴노의 아버지인 상황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우에게 양위하였던 스토쿠 상황은 인세이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도바 법황의 세력이 강력했고, 스토쿠 덴노의 아들은 황후인 셋칸 가문의 딸 후지와라씨의 자식이 아닌 [[후궁]]의 자식이었으며, 나리히토 친왕이 스토쿠 덴노의 황후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스토쿠 덴노의 장인이었던 셋쇼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가 도바 법황과 손을 잡아버렸던 탓이었다. 결정타로 양위식 때 양위문에는 황태자가 아닌 '황태제'에게 양위한다고 쓰여, 스토쿠 덴노가 아우에게 양위하는 형식이 되었기에 스토쿠 상황의 인세이가 불가능하게끔 되었다. 이에 스토쿠 상황도 가만 있지는 않아서 [[동생]]인 코노에 덴노의 유사시를 대비해 자신의 맏아들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을 도쿠시에게 양자로 들이게 했다. 이렇게 되면 시게히토 친왕이 천황이 될 경우 천황의 친아버지라는 명분으로 인세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스토쿠 상황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1155년]] 병약한 코노에 덴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도쿠시 등은 스토쿠 상황이 인세이를 하는 걸 막으려고 도쿠시의 또다른 양자이자 도쿠시 소생 황녀와 결혼하게 되는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을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리히토 친왕은 당시 너무 어렸기에 장성하여 천황이 될 때까지의 징검다리로 모리히토의 친아버지인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 도바 상황과 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의 4남)을 태자 책봉도 안 하고 천황으로 덜컥 즉위시켜 버렸다. [[장유유서]]의 문제도 있었고, 도바 상황의 측근이자 마사히토 친왕의 유부(乳父)였던 신제이(信西)가 마사히토 친왕의 옹립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로[* 하급 귀족 출신이던 승려 신제이는 그 덕에 이후 천황의 후견인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권세와 개혁으로 인한 귀족들의 반발을 사 헤이지의 난에서 살해되기에 이른다.] 그가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이다. 실제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 그 아들이었기에 고시라카와 덴노의 즉위 이후 곧장 모리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도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