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세이 (문단 편집) ==== [[호겐의 난]]과 무사세력의 대두 ==== 이는 분명 파행적인 일이었으나 스토쿠 상황으로선 막을 힘이 없었다. 결국 도바 상황이 죽은 후인 [[1156년]], 고시라카와 덴노와 스토쿠 상황은 무력으로 충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호겐의 난]](保元の乱)'이다. 호겐의 난은 인세이 체제의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되어 버렸다. 스토쿠 상황은 후지와라 셋칸케의 씨장자 자리를 놓고 다투다 형 타다미치에게 밀려나던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와 손잡고, 무사세력을 규합했다. 이 때문에 타이라 씨족과 [[미나모토]] 씨족 역시 분열되었으나 결국 상황군이 패배하여 스토쿠 상황은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 친왕은 출가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1158년]] 고시라카와 덴노가 아들 모리히토 친왕과 그 후견인 도쿠시의 압력으로 퇴위하여 상황이 되었다.즉위한 [[니죠 덴노]](二条天皇)는 정사에 적극적이었으며, 권력은 막대한 장원을 가졌던 도쿠시와 셋칸케 및 타이라 가문의 보좌를 받던 아들에게 있었기에 고시라카와 상황은 권력을 잃은 채 한가로이 지내었다. 상황 소유의 장원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에게서 몰수한 장원 정도였기에 경제적으로도 위축되어 있었다. 이듬해(1159) '헤이지의 난(平治の亂)'이 발발해 상황의 측근들이 죽고, 유폐되었다 탈출하는 일도 있었으나 그때조차도 쟁점은 아들인 니죠 덴노의 신변으로, 고시라카와 상황은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난의 와중에서 신제이(信西)가 살해되고, 주모자로서 다른 측근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살해되는 등 상황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원래 도바인의 측근이던 신제이나 그외 친정파를 몰아내고 인세이를 행하고자 고시라카와인이 이를 사주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 후 남아있던 상황의 측근들은 정쟁에서 패해 파직당하고, 귀족들도 상황을 징검다리로 보아 상황에 협조하지 않았다. 정치에서 소외된 고시라카와 상황은 불교, 특히 관음신앙에 심취하여 [[쿠마노]](熊野)를 수 차례 참배하였으며, 타이라 가문의 조력을 얻어 관음상 1천 좌를 안치한 관음당(觀音堂)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관음당 완공 후 기뻐하던 상황이 아들인 니죠 덴노에게 왕림을 청했으나 제위 계승과 인세이 문제로 사이가 멀어졌던 천황은 끝내 왕림하지 않았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거절된 당시나 천황 사후에 이를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165년]] 니죠 덴노가 요절하면서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 상황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협조를 받아 본격적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키요모리의 [[처제]]인 타이라노 시게코(平滋子)와 결혼하여 유착을 강화하였는데, 정략적인 면이 강한 [[혼인]]이었으나 시게코는 상황의 총비가 되어 수차례 쿠마노 참배를 비롯한 상황의 여러 여행길에 항상 동행하였다. 키요모리와 그 일족을 등용하고 승진시키면서 그 재화와 무력을 얻어 고시라카와는 권력을 누렸다. 그는 [[손자]]인 [[로쿠조 덴노]](六条天皇)를 퇴위시키고, [[황후]] 타이라노 시게코가 낳은 7남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을 키요모리의 지원을 받아 [[다카쿠라 덴노]](高倉天皇)로 즉위시켜 천황의 생부로서 지위를 굳혔으며, 로쿠조 덴노의 황후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딸 토쿠코 또한 양녀로 삼아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셋칸케는 호겐의 난 이후 권력이 약화되었던 데다, 셋칸케의 방대한 영지의 대부분이 고시라카와인의 묵인 아래 키요모리의 딸이자 죽은 후지와라노 모토자네(藤原基実)의 아내였던 모리코(盛子)의 휘하에 들어가 타이라가가 관리하게 되면서 상황은 셋칸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타이라 가문을 이용해 반항적인 사원들의 강소를 억누르며 임의적인 정치를 행하던 고시라카와인은 황후 시게코 사후 타이라 가문과의 틈이 벌어져 결국 타이라 가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미 시게코 생전부터 타이라 가문의 권력이 너무 강력해져 셋칸케의 영지마저 관할하고, [[수도(행정구역)|수도]]의 [[치안]] 및 군사권을 거의 장악하여 키요모리의 승인 없이는 강소 저지의 인젠(院宣)조차 무력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엔랴쿠지(延暦寺)가 엔랴쿠지의 말사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후지와라노 모로타카(藤原師高)[* 인의 근신 사이코(西光)의 아들]의 [[유배]]를 주장하는 강소를 벌였는데, 키요모리는 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진압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로 인해 측근의 아들들을 유배시켜야 했던 고시라카와 상황과 키요모리와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상황은 타이라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이것이 [[1173년]] '시시가타니 사건'이었다. 이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누설되어 나리치카나 [[승려]] 사이코를 비롯한 상황의 측근들이 제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이코(西光)는 처형되었고, 키요모리의 장남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처남이던 나리치카마저 유배 후 아사하였다. 고시라카와 상황 역시 도바 이궁에 유폐되었으며, 조정은 천황과 친 헤이케 귀족들 및 타이라 일문의 [[공경]]들로 채워져 정사가 행해졌다. 고시라카와 상황은 유폐된 가운데에도 은밀하게 지방에서 반 헤이케의 기치를 내건 겐지 일족과 연락했으며, 다카쿠라 덴노와 키요모리의 사후 정치적 공백을 틈타 인세이를 재개하였다. 그는 모략을 써 가며 [[1185년]] [[안토쿠 덴노]](安徳天皇)를 폐위하고, 다른 손자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를 옹립하였으며 헤이케 토멸의 선지를 내리는 등의 행동으로 타이라 가문의 [[멸망]]을 이루었으나 그 과정에서 군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장악하였다. 이에 상황은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이자 용맹으로 이름높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부추겨 형제간의 내분을 획책하였으나 요리토모의 전격적인 진압으로 인해 실패했으며, 반발하는 요리토모를 달래고자 결국 그의 동국 지배권을 인정해야 했다. 요리토모는 동국에서 기존 국가의 지방통치체제를 대신하는 자신의 봉건적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본격적인 무가정권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