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육 (문단 편집) === 일본 === 미국의 동물학자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 1838-1925)는 1877년 일본에서 최초로 [[도카이도 본선|철도]]가 가설된 [[요코하마역|요코하마]]에서 [[도쿄역|신바시]]까지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오모리역(도쿄)|오모리]]에서 선사시대 패총을 발견한다. 발굴조사를 한 결과 인골을 습득하게 되었고 여기서 식인의 흔적을 확인하게 되며 이는 일본의 식인 문화에 대한 초창기 근대 연구를 시작하게 한다. [[스이제이 덴노]]가 일곱 사람을 먹었다는 고사 『신도집(神道集)』을 비롯해 [[슈텐도지]] 설화 중에 [[미나모토노 요리미츠]] 일행이 슈텐도지를 토벌하기 위해 귀족의 딸의 피가 섞인 술과 인육을 슈텐도지에게 먹여서 안심시킨 후 저치한 이야기와 [[후쿠시마]] 아다치가하라(安達原)에 살고 있던 "인간을 잡아먹는 늙은 여자 요괴 [[오니바바]]" 등 설화로 일본의 식인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 야나기타가 저술한 《토오노 이야기(遠野物語)》에 훗타 소면(筋太の素麺)을 먹는 풍습의 유래에 대해서 죽은 애처의 살과 힘줄을 먹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전국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고쿠 정벌을 하던 때 돗토리 성을 공략하기 위해 치밀한 공작으로 보급을 차단해 배고픔에 허덕이는 수성측은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히데요시가 미리 상인으로 위장하여 성 안의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사들인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수성측이 처음엔 쌀을 낱알째 세어가며 나눠주다가 쌀이 바닥나자 금기시된 소와 말 같은 가축들을 잡아먹고 그것들도 바닥나자 나뭇잎을 먹었고 나뭇잎조차 다 없어지자 최후의 수단으로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었고 그것도 없어지자 산 사람들끼리 서로를 죽여서 잡아먹었으며, 그 끔찍한 모습을 본 히데요시측 군사들조차 충격을 받아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신저문집(新著聞集)』에선 일본 7대 사찰 중의 하나인 조조지(増上寺)의 승려가 장례식에 죽은 자의 머리를 삭발하다가 실수로 두피를 약간 깎아 잘못을 감추기 위해 그것을 자신의 입에 넣었는데 매우 맛있다고 느껴 이후 자주 묘지에 나가 무덤을 발굴하여 썩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진전쟁]]때에는 막부측의 총지휘관이었던 마쓰다이라 마사타다(松平正質)가 적병의 볼살을 구워 술안주로 먹었다거나, [[사쓰마 번]]의 병사들이 시체에서 간을 꺼내 삶아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파일:attachment/f00069574c9e7d4b1f52c.jpg]] 가장 확실한 기록은 에도 시대의 4대 대기근 때에 인육을 먹었다고 하는 것이다. [[덴메이 대기근]] 때인 덴메이(天明) 4년(1784년) 히로사키(弘前)에서 식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다치바나 난케이(橘南渓)가 《동유기(東遊記)》에 적고 있다. 인육을 민간요법에서의 치료약으로 활용한 기록에 대해서, 에도 시대 처형된 죄인의 시체를 상대로 [[일본도]]의 성능을 시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야마다 아사에몬]](山田浅右衛門) 가문이 시체에서 빼낸 간을 말린 것을 약으로 팔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이것은 정당한 약재로 인정받았으며, 야마다 집안은 이를 통해 다이묘와도 맞먹을 재력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메이지 3년(1870년) 4월 15일자로 사람의 간, 뇌수, 음경 등의 밀매를 엄금하는 변관 포고를 내렸다. 그러나 이들 인체에 대한 밀매는 여전히 성행하여 자주 사건으로 입건된 일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작가 하세가와 시구레(長谷川時雨)는 메이지 중기의 이야기로서 "폐병에는 죽은 사람의 물, 화장된 사람의 뼈단지 밑에 고인 물을 먹으면 좋은데 이건 뇌를 태운 것"이라며 보여준 「영약(霊薬)」 꾸러미를 보고 새파래졌던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한 적도 있다. 쇼와(昭和) 40년대까지 일본 각지에서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속설을 믿고 매장된 시신을 파서 간이나 내장을 적출하여 불태운 것을 고가에 팔거나 병자에게 먹이거나 한 혐의로 체포된 일이 신문에 종종 보도되었다. 이같이 인간의 내장을 약으로 삼았던 것에 대해서 아직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마나세 도산(曲直瀬道三)의 양자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瀬玄朔)는 의학서 「일용식성(日用食性)」에서 동물의 고기를 수프나 찜, 회 등으로 조리해 먹으면 각종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해설하고 있으며, 육식 자체가 약 처방으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방약(동양의학)에서 곰의 쓸개(웅담)는 담석증, 담낭염, 위궤양 진통, 진정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최고급 약품으로 치부되었다. 에도 중기의 고방파(古方派) 의사였던 고토 간산(後藤艮山)은 웅담환(熊胆丸)이라는 약을 조제 처방하기도 했다. 이러한 약학적인 생각은 중국이나 인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 설화 등에도 의약적인 인간의 내장 섭취에 대한 기술이 있다. 또 일본의 장례식에서 불에 타다 남은 뼈를 먹는 풍습이 일본 곳곳에 남아있었다. 확인된 지역은 아이치현 미카와지방 서부, 효고현 아와지섬 남부, 에히메현 오치군 오시마, 니가타현 이토이가와시. 배우 카츠 신타로(勝新太郎)가 아버지의 유골을 먹었다고 본인 입으로 증언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들의 인육을 일본군이 나눠 먹었다는 사실이 [[만주국]]의 위안부 문건 공개를 통해 확인되었다.[* [[http://sports.chosun.com/news/ntype4.htm?id=201508180000000000012900&ServiceDate=20150818|밑에서 다섯번째 문단에 나온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중장인 [[다치바나 요시오]]가 사기 상승을 명목으로 미국군 파일럿들의 인육을 먹은 사건이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있었다]]. 이 사건의 피해자가 될 뻔했던 사람이 바로 미국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로, 그가 재임기간 동안 [[혐일]]이라는 의심까지 받을 정도로 일본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친형제처럼 아꼈던 전우들을 모두 잃은데다, 이게 굶주림에 지쳐서 인육이라도 뜯으려했던 게 아니라, 술맛이 안 난다면서 [[식인]]을 한 어처구니없는 경우였기에, 이 일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로 이어진 것이다. 일단은 [[중국]]이나 [[소련]]을 견제하기에는 일본의 지정학적인 이점이 너무 커서 대외적으로는 [[친일]] 외교를 하긴 했으나, 그러면서도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 당시의 [[천황|덴노]]였던 [[쇼와 덴노]]가 죽었을 때, '''"이제서야 일본을 조금은 용서할 수 있겠다."'''[* 뒤집어 말하면 '''쇼와 덴노가 죽는 순간까지 일본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고 발언했다. [[밀리환초 학살사건]]이라 하여 치치지마섬 사건과 유사한 사례가 있긴 하나, 이쪽은 단순한 자만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오랫동안 섬 안에 보급도 못 받고 갇혀지내느라고 기갈에 시달리던 이들이, '''이미 사망한 시신'''의 고기를 부득이하게 뜯은 거라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여기도 아무리 굶주렸다고 한들, 인육 좀 뜯겠다고 착취하던 [[한국인]] 징용자들을 학살했다. [[사가와 잇세이]] 문서에도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