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삼전도의 굴욕|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 ====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구원을 바라면서 47일 동안 농성했으나,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전부 각개격파(괴멸)되어 더이상 희망이 없자 [[김류]], [[최명길(조선)|최명길]] 등이 "피폐(皮幣), 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청하고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자, 결국 주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항복하여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야사에는 인조가 이것을 하다가 소리가 안들린다고 [[홍타이지]]한테 한소리 듣고 소리가 더 나게 이마를 찧다가 피까지 났다고 하는데 한국사에서 왕이 몸소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 최대의 굴욕[* 굳이 따지면 [[고려]] [[원종(고려)|원종]] 때 [[원나라]]의 초대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직접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인조의 항복은 그것에 이어서 두번째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칸 계승문제에 끼어들어 원제국 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한 원종의 승부수와 동일하기엔 힘에 밀려 강요받은 굴욕이었다.]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굴욕으로 인하여 왕권이 바닥을 쳐서 인조실록 15년([[1637년|1637]], 정축년) [[1월 30일]] 기사를 보면 삼전도 굴욕 후 [[창경궁]]으로 환궁하기 위하여 한강 소파진에서 배를 타는데 신하들이 먼저 타려고 '''인조의 옷을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다. 이렇게 망신을 당했는데도 인조는 처벌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인조가 계속 왕권을 회복 못하고 허수아비가 된 것은 아니다. 후에 인조가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민회빈 강씨]]를 ‘개새끼(狗雛)’라고 부르며 없는 죄(임금이 먹는 수라상에 전복이 나왔는데 독이 묻어나왔다고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이고, 소현세자 쪽 손자들을 유배 보낼 때는 온 조정 신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뜻대로 강경히 밀어부쳤다. [[https://www.dogdrip.net/455324156|#]]] 청은 왕(인조)에게 굴욕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자와 [[봉림대군|왕자]]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한 굴욕을 후세에 길이 남기도록 비를 세우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줄여서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 삼전도비는 이 사진에 나온 위치에 있지 않고 [[2010년]]에 [[석촌호수]] 공원으로 옮겨놓았다. 고증에 따르면 정확한 위치가 석촌호수 '''물 속'''이라고 하며(당연히 조선 시대에 물 속에 세운 게 아니라, 원래 삼전도비를 세운 위치에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석촌호수의 물이 찼다는 의미다.) 물 속에 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공원 내부에 세웠다고 한다.[[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455432|#]]] 다시 말해 조선을 침략한 적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스스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현대까지도 남아있는 이 비석은 당시 [[유교]] 국가이자 명에 대한 [[사대]]를 견지해온 조선의 입장에서 실로 길이길이 대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내내 두고두고 조선의 수치(獸恥)를 상징하는 표시로 남았으며, 한국사의 흑역사로 치부되어 현대까지 수난을 겪었다. 청의 국력이 약해진 구한 말부터는 당연히 보복의 대상이 되어[* 실제로 이 시기부터 반중 감정이 엄청 강해져 나중에 [[만보산 사건]] 같은 일도 벌어지게 된다. 문제는 그 대안으로 택한 [[일본 제국|나라]]가...] 훼손의 운명을 겪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무너지자 바로 삼전도비를 파묻었고, 일제가 이를 다시 일부러 복구했으나 이번에는 [[1956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당시 문교부에서 치욕의 상징이라며 또 파묻었다. [[1963년]] 이걸 또 꺼내서 다시 훼손하지 못하게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이번에는 [[2007년]] [[2월 3일]]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서울]] 한복판에 국가적 치욕이 버젓이 서 있는걸 볼 수 없다며 페인트로 훼손을 가했다.[* 그는 동학 운동을 촉발케 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선정비도 공격한 이력이 있으며, 국가적 치욕의 장본인인 인조의 사당도 공격 타겟에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 남자는 [[2012년]] [[12월]]에 [[노태우]] 생가 방화 용의자로 붙잡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정의 실천 행동당이라는 [[진보]] 단체 소속으로 밝혔으며, 방화 현장에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 편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러다 약 3개월이라는 시간 끝에 복원에 성공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5%A4%A7%E6%B8%85%E7%9A%87%E5%B8%9D%E5%8A%9F%E5%BE%B7%E7%A2%91%E6%AF%81%E6%90%8D01.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5%A4%A7%E6%B8%85%E7%9A%87%E5%B8%9D%E5%8A%9F%E5%BE%B7%E7%A2%91%E6%AF%81%E6%90%8D02.png|width=100%]]|| ||<-2> 페인트로 훼손당한 사적 101호 '삼전도청태종공덕비' || 훼손된 삼전도비는 정부에서 정성껏(?) 복구해 조선 시대의 원위치로 옮겨 세워놨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148034|관련 기사]] 허나 아무리 반면교사적 가치가 있다고는 해도 이쯤 되면 좀 안타깝다. 하지만 '''비록 치욕의 역사라고 해도 역사는 역사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치욕의 역사라 해서 무시한다면, 자기 정권에 유리하게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보수 극우정권이나, 이념에 따라 광기적인 반달리즘을 자행하였던 [[중국]]의 [[홍위병]]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43672| 이 행동에 대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096923|비판하는 기사들]] 또한 이를 통해 후세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