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묘호 "인조" == 묘호는 [[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오대십국시대]] [[남당]]의 임금 [[이변(남당)|서지고]]가 이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 [[대행]](大行)[* [[죽음|승하]] 후, 아직 시호(묘호)가 정해지지 않은 군주의 신주를 [[종묘]] 세실에 모시기 전에 임시로 불러 칭하는 호칭.]에게 이 글자를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라는 비판에 의해 수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논한 신하들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있어 갑론을박을 하며 재논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 [[묘호]]의 최종결재권은 [[효종(조선)|임금]]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효종(조선)|효종]]이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 "[[열조]](烈祖) 두 글자는 《[[시경]](詩經)》과 《[[상서|서경]](書經)》에서 칭한 바와 [[유비|한소열]](漢昭烈) 묘호의 자의(字義)를 취한 것으로 진실로 [[인조|대행 대왕]](大行大王)의 공덕(恭德)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들은 남당(南唐)이 참람(慘濫)한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호]](諡號)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인(仁)'자가 대행 대왕(인조)의 묘호로 가장 합당합니다.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祥考)하건대 역대 제왕의 시호에 부자(父子)가 호칭이 같은 이도 간혹 있었으니, 우리 나라 [[세종(조선)|세종]](世宗)과 [[세조(조선)|세조]](世祖)의 호칭도 어찌 이에서 근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나라]] 제도를 상고(祥考)하건대 이미 [[주세진|인조]](仁祖)가 있는데 또 [[홍희제|인종]](仁宗)이 있었습니다. 근거할 만한 고금(古今)의 전례(典禮)가 이미 이와 같을뿐더러 주공(周公)의 군부(君父)와 같은 시호를 쓴다고 한 것이 더욱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니, 이로써 결단하여 의논하건대 오늘의 묘호로는 이 '인(仁)'자를 버리고는 달리 쓸 글자가 없으니 '인(仁)' 자로 고치소서."[* 출처: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5월 23일 (신사)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005023_001|#]]]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조선)|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仁)'자를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조선)|예종]]임금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조선)|세종]]이 있음에도 [[세조(조선)|세조]]를 붙여준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홍희제|인종]]과 [[주세진|인조]]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묘호]]가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열조]]"는 시법(詩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이다. 실록에선 [[한나라|한]] [[유비|소열 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恭德)에 부합된다고 적었다.[* 여기서 [[유비]]가 [[한나라]]의 명맥을 이은 '계한'의 창시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묘호]](廟號)가 정해질 시점엔 사실 알 수 없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인조 역시 조선 제2왕조의 실질적 창건자가 되었으니 [[유비]]와 넘사벽 급 차이가 나는 업적과는 별도로 이 정도의 묘호를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은 있었다. "열조"까지는. 많은 왕조의 태조들이라고 무조건 그에 걸맞는 인성과 업적을 갖추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시법에서 '인(仁)'은 [[유교|성리학]]에서 추앙하는 최고/최상의 덕으로, "인조"라는 묘호는 [[성군]] 중의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엄청,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 예를 들어 [[성종(조선)|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 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행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출처: '''《[[연산군일기]]》 2권, 연산 원년([[1495년]], 명 홍치(弘治) 8년) 1월 14일 (무술)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ja_10101014_001|#]].]"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굳이 [[성종(조선)|성종]]으로 하자면 大자를 붙여서 대성종(大成宗)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후 양반 사대부들에게 [[세종(조선)|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 다만, 이때는 [[명나라]]에도 [[홍희제|인종]]이라는 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봐서 [[성종]]으로 정해졌으며, [[연산군]]이 자치통감에 나온 중국 [[송나라]]의 [[인종(송)|송인종]]을 들어 성종이라는 묘호가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祖)'는 보통 재조[* 여기서 말하는 재조는 나라를 다시 재건, 세운다는 뜻의 사자성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말하는 것이다.]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조선/왕사|임금]]에게 올리는 영예로운 [[묘호]]이다. 관례적으로 '조(祖)'는 왕가를 연 시조와 중시조로 대우받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이며 종은 공덕과 무관하게 왕가라는 종가를 계승한 왕들에게 일괄적으로 쓰였다. 시법을 근거로 '조(祖)'와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도 하지만, [[조선/왕사|왕]]이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종에 비해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 조를 더 높게 쳤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찬탈 등의 결격사유가 있는 부왕을 둔 후계자들이, 취약한 정통성과 도전받는 왕권을 포장하기 위해 거꾸로 아버지에게 '조'를 바치는 추숭사업을 강행했다. [[단종(조선)|왕이 된 어린 조카]]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아들 [[예종(조선)|예종]]은 아버지에게 '세조'를, 임란 내내 추태를 보여 왕가의 권위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선조(조선)|하성군]]의 아들 [[광해군]]은 제 아버지에게 '선조'를, 정치암투에만 능하고 내정과 외교를 모두 말아먹은 희대의 암군 능양군의 아들 효종은 제 아버지에게 '인조'를 묘호로 선사하며 [[영구결번]] 급 귀한 묘호를 남발했던 것이다. [[강화도|강화도령]] 출신으로 정통성이 약했던 [[철종]] 역시 [[홍경래의 난]]과 [[세도정치]]로 얼룩진 치세를 보낸 양아버지 순종을 '[[순조]]'로 다시 추숭하였다.[* 영조-정조-문조([[효장세자]])의 경우 [[대한제국]] 창업에 따라 [[고종(대한제국)|고종 태황제]]의 5대조를 [[대한제국|제국]]의 5대 시조로 모시는 추숭사업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남발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조'들이 과연 세조의 전례를 들어 다른 왕들을 제치고 왕가의 시조 대우를 받을 자격과 업적을 가진 왕들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결국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에, 거의 요순급의 이상적인 초월 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조선사뿐만 아니라 5,000년 한국사를 통틀어 [[현종(고려)|현종]]이나 [[세종(조선)|세종]] 정도만이 어울릴 만한 그 정도의 묘호라는 얘기다.즉, 암군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영예로운 [[묘호]]다.[* 현종은 태묘악장이나 기타 서적에 [[성조]](聖祖) [[열조]](烈祖)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묘호에서 알 수 있듯이 업적과 덕이 정말 높았다. 왕이 되기 전 불우한 인생을 보냈고, 왕이 되어서는 인조와 같은 아니 더 어려운 난관들을 격었지만 모두 이겨내고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 실제로도 이미 당대에 요순에 비유되며 주변 국가 군주들에게도 인정 받을 정도로 훌륭한 군주였다. 세종은 [[4군 6진]]의 개척을 이유로 세(世)를 묘호로 하였다 두분다 왜 조가 아니라 종이었냐면 개국을 한 태조 외에 (재창업 급 중흥군주가 아니면서) 조 자를 쓴 예가 이전까지 없었으므로.] 이 때문인지 인조를 싫어하는 현대인들은 아예 '''능양군'''이라고 깎아내려서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 인조라는 묘호를 받은 사람은 명 태조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朱世珍). 입지전적한 창건자의 아버지니 명예로서의 추숭으로 본다면 차라리 합리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