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 (문단 편집) === 출생 및 초기 === [[1595년]](선조 28년), [[황해도]]의 [[해주목]]에 있었던 [[해주행궁|해주 행궁]]에서 선조의 첫번째 손자로 태어났다.[* 임해군은 친아들이 없었고, 광해군도 자녀를 늦게 보았기 때문에, 동생인 정원군이 먼저 아들을 보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황해도]] [[해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 [[인헌왕후|연주군부인]] 구씨가 그곳에서 능양군인 [[인조]]를 출산한다. 실록에 실린 인조행장을 보면, [[고제(전한)|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서 할아버지 [[선조(조선)|선조]]가 이걸 보고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행장'인 만큼 왕을 돋보이기 위한 덧붙힌 기록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인조의 삼촌 격인 [[광해군]]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행장(行葬) 특유의 과장으로 보인다.[* 다만, 인조의 아명이 천윤(天胤)으로 선조가 직접 지어줬는데, 뜻이 하늘天과 후계자를 뜻하는 胤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의 기분이 얹짢았을 수도 있다.] 선조 때 '''능양군(綾陽君)'''으로 봉해졌다. 정치감각이 빼어났던 할머니 [[인빈 김씨]]가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된 후 입장을 바꿔 자신의 조카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고, 여러모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광해군 초기 때까지는 대우가 좋았다. 그의 아버지 [[정원군]]은 왕실 종친의 어른으로서 [[광해군]]이 옥사([[봉산옥사]], [[계축옥사]])를 일으킬 때 관제데모를 주도하는 바지사장 역할 정도만 하면서 유유자적 지냈다. 하지만 살벌한 공안정국은 이들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위 중반으로 갈수록 의심병이 심각해진 [[광해군]]은 역모 고변만 있으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옥사를 일으키고 [[임해군|혈]][[영창대군|육]]들도 예외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