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반정 (문단 편집) == 반정의 진행 == [youtube(Vedb1qZIO3s)] 능양군의 600~700명의 병력을 필두로 장단의 이서 군, 이천의 이중로 군이 속속 합류했다. 그러나 반정 직전 포섭한 이이반[* 참고로 이 사람은 [[세종(조선)|세종]]의 단명한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다시 말해 왕가의 종실 출신이다. 결국 고변한 대가로 반정 직후 처형된다.]이라는 인물이 어찌된 셈인지 내막을 고변해 반정 세력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고 특히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가 집에 틀어막혀 두문불출하자 이에 급한 대로 무관인 이괄을 대장으로 [[창의문]]으로 진군했다.[* 고변이 들어오자 김류는 겁을 먹고 집에 숨어있었다. 이괄을 임시 대장으로 삼고 심기원과 원두표가 부리나케 달려가 김류를 가까스로 끌고 왔다.] 게다가 이미 이들과 내통한 훈련대장 이흥립(박승종의 사돈)이 창의문을 내어주어 별다른 저항 없이 궁궐을 접수했다.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에 돌입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창덕궁]]은 이때 불에 타 전소되었고, 인조는 [[이괄의 난]] 이전까지 [[창경궁]]을 주로 사용했다.] 반정이 성공하자, [[경희궁|서궁]]에 유폐 중이던 대비는 혹시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가 아닌가 싶어 궐문을 걸어 잠갔다. 반정의 수뇌부들이 와서 왕을 폐했으니 문을 열어도 된다고 청했음에도 무시했으나 능양군이 직접 와서 설명하고 나서야 믿고 자신이 이 날을 보기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나갔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반정 세력을 지지하여 명분을 실어준다. 왕은 야밤의 기습에 제대로 대처해 볼 겨를조차 없이 궁궐을 탈출해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으나, 얼마 안 가 밀고자 때문에 붙잡혔고, 결국 폐위된 뒤 유배되었다. 옥새를 내리기 전에 대비가 왕과 [[폐세자 이지|왕세자]]의 목을 베어 살점을 씹기 전에는 책봉이고 나발이고 없다고 버텨서 잠시 소동이 있었으나, 애시당초 능양군 일행은 대비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반정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하들이 임금을 폐한 예는 있어도 주륙(誅戮)한 예는 없다고 잘라 말했고, 대비가 그러면 이이첨, 류희분이라도 자기 손으로 처단해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했으나 즉위 후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권력이 없던 대비는 결국 옥새를 내려준다.[* 물론 그 후에 [[이이첨]], 류희분은 대비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처단됐다. 특히 이이첨은 아들들까지 목이 달아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