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조반정 (문단 편집) == 반정의 영향 == >내(인조)가 즉위한 이래 일찍이 한 번의 사개도 왕래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정묘호란|정묘년 봄에 그들 적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 변방에 기습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wpa_11101029_002|인조실록 28권, 숭정 6년1월 29일 2번째 기사]] 인조반정 직후 집권층은 모문룡과 명 사신 맹양지(孟養志)에게 광해군을 비난하면서 인조 정권은 명에게 동심협력을 할 것을 피력하였다. 왕은 광해군은 끝끝내 수락하지 않은 모문룡의 둔전 및 염전 요구를 허락하여, 그의 신뢰를 얻고자 하였으며, 도성 방어책과 '친정'을 논의하면서 여론에 힘입어 어영사(御營使)를 발족하고 자신이 3군을 모두 거느리고 친정하겠다는 유지를 내려 친정 계획을 공식화했다. 한편으로는 광해군대 진행되던 물밑 외교를 중단했다. 즉, 반정 직후에는 역관, 차관의 파견 자체를 중단했으며, 후금이 월경할 경우 간과종사(干戈從事)하고, 후금의 교섭을 요구해오면 신중히 대응하면서 모문룡 측과 정보 공유를 지침으로 삼았다. 물밑 외교의 단절로, 광해군 대 여진인 쇄환은 중단되고, 반정 이후 포획한 여진인들은 가도의 동강진이나 국내의 도서 지역에 구류했다. 그러나 모문룡은 구실을 갖춘 동맹이 아니었고, 교섭을 단절하여 후금의 정보를 알 수 없었던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무력하게 당하고 현실과 빨리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69~303.] 인조반정 이후 몇년 만에 발발한 [[정묘호란]] 과정에서 인조를 필두로 한 집권층이 접전 자체를 회피하여 일관되게 화친을 추진한 것에 대한 반발로 척화론이 득세하였으며, 후금의 요구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 강렬해져 ‘화친이 아니라 항복’이라며 인조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거나, [[이귀]], 이서, 최명길 등을 참수하자는 극단적인 요구까지 제기되었다.[*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316~328; 계승범(2021), 《모후의 반역》, p. 319.] 결국 인조 정권은 후금과 강화를 맺음으로써 인조반정 교서의 명분 중 43%를 차지한 배명(背明)의 명분을 상실하였으며, 그것은 광해군보다 더 명을 져버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계승범(2021), 《모후의 반역》, p. 307~318.] 이러한 영향 속에 1627년 9월 [[강원도]] [[횡성군]]에 은거한 이인거가 화친에 분개하여 '창의중흥대장'을 자칭하며, 주화 인사들을 처단하고 의주로 나아가 후금을 막겠다고 군사를 모았다가 발각되었다.[* 한성주(2017), "[[정묘호란]] 직후 ‘李仁居의 난’ 연구", 《서울과 역사》 96.] 거기다가 왕은 역적의 고변만으로 끊임없이 역모의 추대자로 거론됐던 인성군을 자진시켜 반정의 양대 명분 중 하나였던 폐모살제에 대한 비판까지 무색하게 했다. [[병자호란]] 이후 한양으로 환궁한 인조는 인성군의 관작을 회복시켜 폐모에 관한 명분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한성주(2017), "정묘호란 직후 ‘李仁居의 난’ 연구", 《서울과 역사》 96, p. 154~155.] 배명 대신 폐모의 명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란 이후 편찬된 거의 모든 문헌에서 반정의 명분을 광해군의 폐모에 집중시키고, 배명 행위는 거론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효의 가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범할 수 없다는 명제가 절대 가치로 굳어지고, 성리학적 종법에 따른 가족과 가문을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분위기에 추동력을 제공했다.[* 계승범(2021), 《모후의 반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