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천항 (문단 편집) == 역사 == [[조선]] 초기에도 [[제물포]]로 불리며 항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인천항이 본격적으로 항구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강화도 조약]] 체결로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되면서부터이다.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 항만을 건설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한성과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개항지로 낙점되었다. >(인천은)물길을 이용하여 경성으로 왕래하기에 입구의 역할을 하므로 선박이 정박해야 하는 곳이다. 먼저 이 지역을 당분간 통상을 행하는 지역으로 삼고 별도로 다른 좋은 항구를 얻어 옮기는 것을 기약할 것. >---- >일본외교문서, 외무성, 1949 1883년 일본인 거류지가 설치되고, 1884년 청나라 거류지, 기타 각국 거류지가 설치되었다.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일본인 거류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일본인 거류민회의 주도로 앞바다를 매립하였다(1889~1899). 이를 시작으로 인천역, 인천세관, 만석동 일대 등에서 대대적인 매립이 개시되었다. 인천항의 본격적인 정비는 러일전쟁 이후 불경기가 찾아오고, 경부선(1905)과 경의선(1906)이 개통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산항에서 경부선으로 환적하는 새로운 화물 운송 루트가 만들어지자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차가 커 외항에서 쪽배를 이용해 화물 하역을 하던 인천항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사실상 한반도를 차지하게 되면서 인프라 투자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1908년 인천 거류 일본인들은 인천축항기성회를 세우고,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통감부]]에 적극적으로 청원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비용 문제 때문에 이를 꺼렸지만, 한일합방이 가시화되면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이에 호응하여 축항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는 인천항을 만주 철도로 연결되는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과 일본 정부의 협의 끝에 1911년 6월 인천항 축항 공사가 시작되었다. 1918년 10월 인천항의 이중갑문식 독이 완공되었는데, 동양에서는 최초로 건설된 이중갑문식 독이었다(현 내항 1부두 일대). 비록 갑문을 통과하는데 30분이나 소요되기는 했지만, 이전보다 하역 작업이 훨씬 간편해지면서 하역 수수료도 절반이 되었다. 또한 경인선과 항만이 직접 연결되면서 수출입액이 부산항 다음가는 대외무역항으로 거듭났다. 19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잇는 현대식 갑문이 신설되면서 현재의 내항 전체에 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youtube(EiwZMLrwJao)] 역사적으로 여러번 얼어붙은 적은 있지만 이로 인해 폐항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1963년 기록적인 한파로 인해 개항이래 80년만에 폐항했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11&aid=0002790233|#]] 2017년 [[한진해운]] 파산에도 중소 선사 중심의 인천항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