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사사 (문단 편집) == [[헤이안 시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Samurai_o-yoroi.jpg]] 헤이안 시대부터는 율령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지방의 세력들은 점차 [[호족]]으로 변해갔고 수탈이 심해지자 일본 민중 중엔 도적이 많이 출현했는데 중앙정권은 이를 통제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 때는 도호쿠 지방 국경선 너머로 준동하는 원주민인 에미시와 조정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로 일본 조정은 수차례에 걸쳐 이들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고 에미시 세력이 귀순하면서 이들을 군역에 동원했다. 이 귀순 에미시를 부수(浮囚)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통괄하던 각 지역의 수장들은 싸움의 능한 이들의 전법을 배워 자신들의 장비를 개량하게 되며, 이때 사용한 타치는 칼날의 휨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손잡이는 휘어 있으며, 이 스타일을 토대로 에미시의 도검인 와라비테타치와의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 와라비테타치는 50cm정도의 짧은 칼날에 휨은 없지만 손잡이가 끝으로 갈수록 급격히 좁아지므로 실제로 쥐면 칼날의 방향이 비스듬해져 곡도와 비슷한 효과를 가지게 된다.] 이 것을 일본의 무사들이 도입했으며 마상전투에 걸맞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형 '''[[일본도]]''' [[타치]](太刀)에 해당된다. 말을 타고 [[오오요로이]](大鎧)를 입고 활을 쏘는우리가 생각하는 사무라이(갑옷입고 칼차고 말타는)도 원래는 에미시들 특유의 것 이었는데 나중에 일본이 받아들였다. 초창기 [[사무라이]]의 모습은 에미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러자 지방의 태수급인 코쿠시(國司)들에게 군사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종사한 무인들을 지배세력으로 격상시킨 것이 [[사무라이]]였고 [[일본도]]의 개량 또한 많이 이뤄졌다. 병장기로는 [[나기나타]]와 활을 주로 사용했고, 갑옷([[오오요로이]])은 화살에 대한 방어력을 가장 신경써서 만들었다. 많은 지역에서 여러 무사들이 거병을 했지만 각각의 군대 규모는 크지 않았기 때문에 무력이 뛰어난 일부 무사가 큰 활약을 했다. 해상에서는 수군도 등장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탈영하여 [[왜구]]가 되어 인근 해역의 상선을 약탈했다. 이 무렵의 선박은 노와 돛을 모두 갖추었지만 전투시에는 노만으로 추진했고, 해전 전술은 원거리에서 화살로 견제하다 접현하여 승선전투를 벌이는 원시적인 형태였다. 그리고 [[소헤이]] 즉 [[승병]] 또한 등장했는데 한국이나 중국에선 유사점을 찾기 힘든 완전히 다른 군사 집단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신라, [[고려]] 말기에는 개경에서 승려들이 패싸움을 벌일 정도이긴 했다.] 이름은 헤이안(平安)이었지만 그리 평안하지 않은 시대였다.[* 문화는 융성했다.] [[겐페이 전쟁]]을 거쳐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혼란은 종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