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문화 (문단 편집) === 개인주의 안의 집단주의 === 한국과 일본의 집단주의는 세부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집단주의가 개인이 사회에서 맺는 관계에 중점을 두는 반면, 일본의 집단주의는 개인이 사회에서 맡는 역할에 집중하는 편이다. 따라서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일본의 개인은 사회에 자신을 더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본의 겉모습만 보면 구성원 대다수가 하나의 부품처럼 움직이는 기계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거꾸로, 한국과 다르게 그 외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면모가 보인다.[* 심하면 혈연 관계인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일본의 주택 평면 구조가 한국, 중국과 달리 극도로 폐쇄적인 이유를 이러한 문화적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4/2017082401686.html|#]]] 이는 일본 사회 특유의 간섭, 평가 또는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언어 생활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분명하게 의견을 드러내기 보다 말끝을 흐리거나, 모호하고 가능성 위주로 의견을 표시하는 이들이 많다. 취미 생활 역시 양지에서 벗어나 마이너한 장르의 [[오타쿠]] 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된다. 원한다면 사회 생활에서도 개인적인 부분을 오픈하고 자기 주관도 뚜렷하게 드러내는 한국, 미국, 중국과 비교해도 독특한 모습이다. 물론 경향성이 그렇다는 것이지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긴 하다. 따라서 갈등에 대한 거부감으로 일본은 사회를 특정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에 보여지는 부분에서는 극도의 집단주의가, 사생활에서는 극도의 폐쇄적 개인주의가 혼용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일견 상반되어 보이는 문화가 형성된 이유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의 지배형식이 한국, 중국과 전혀 달랐고 오히려 유럽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근대화 이후 정치 체계에서 영국과 독일의 사례를 많이 참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은 국가가 성립된 이래 강력한 중앙집권정부가 들어선 일이 없었고 법률 역시 지방마다 상이하고 애초에 잘 지켜지지도 않아서, 명목상의 군주나 영주와 관계없이 자치조직의 장인 촌주(名主, 나누시)가 실질적 행정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촌주는 어디까지나 자치조직의 장일 뿐이기에 자신의 지배권을 따르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촌주가 자의적으로 법을 정한다거나 집행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 형벌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앙권력은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 하면, 살인,강도,반역등 상류계층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았고, 심지어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중국이나 한국의 판관이라 할 수 있는 봉행(奉行)의 숫자는 비슷한 시기 한반도나 중국의 정부체계의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고 그 체계도 전혀 정교하지 않았다. 중국의 [[구품관인법]]을 받아들여 9등급이나 나눠놓고도 모자라 정/종으로 나누어 총18등급으로 운영했으나 이걸 사실상 명예직으로만 도입했다.[* 예를 들어 실제 일을 해야하는 납언 대납언과 달리 명예만 있지 일은 할 의무는 없는 권대납언이라는 이상한 보결직을 십수명을 중복임명해놓고서는 정작 납언 대납언은 영원히 공석으로 두는 등, 명예는 자기들끼리 나눠먹고 잘 써먹었지만 실제로 행정제도로서의 작동은 유명무실했다.] 왜냐하면 실제 행정제도에는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황과 막부의 이중 조정이 유지되는 것도 있었지만 막부의 벼슬이라 할 수 있는 역직(役職)도 마찬가지라서 그것도 그냥 명예직이었다. 그 이유는 하층민들의 촌락자치제가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냥 행정 자체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때가 되면 무사들이 가서 논밭 조사한 후 조세만 수취하면 끝이었다.[* 여담이지만 일본은 명목상 수확의 5할, 심하면 7할까지 걷었어도 그 외의 다른 수탈은 거의 없었던 데다 뺏었다 돌려주기 식이긴 해도 특산품이건 용역이건 농민에게 수취한 쌀을 대가로 지급했기 때문에 공업과 상업이 비슷한 상황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발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조선과 중국은 보통 수확의 1할을 기준으로 한 조세제도를 돌렸는데 중앙집권국가 치고는 국가 체급에 비해 동원할 수 있는 국력에 한계가 있었고, 국가체계가 잘 돌아갈 때는 농민들에게 매우 유리했지만 부정부패가 심해지는 시기에는 실제 민간 수탈량이 대폭 늘어났다.] 그러면 촌주의 지도력과 중재에는 따르지 않고, 그렇다고 무사들이 귀찮게 나설정도의 심각한 범죄가 될 정도로 사건은 아닌 경우는 어덯게 처리되었는가 하면. 민간에서 암암리에 정리했다. 이를테면 음식 좀도둑,백수건달, 성추행범등이 이런 것인데 이른바 [[메이와쿠]]에 해당하는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마을 사람들이 합의하여 살해한 후 암매장 해버리는 것이다. [[나라야마 부시코]]등에 마을 사람들이 합의하여 좀도둑 일가 전체를 묻어버리는 일이 잘 나와있다. 이런식으로 마을 사람들이 합의하에 해버리는 린치는 그 마을의 조세 수취량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기에 세금 수취를 하는 지배자들이나 봉행들도 아예 못보고 못들은 척 했다.[* 이러한 악습은 시간이 흐르자 마을의 10가지 애경사 중에서 소방과 장례를 뺀 나머지를 도와주지 않는 절교 행위로 조금 순화되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린치 행위가 동반되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 바로 '''무라하치부(村八分)'''이다. 21세기인 지금도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범죄자 가족, 혹은 민폐를 끼친 사람의 집이란 이유로 집 외벽에다 '쓰레기', '꺼져라' 라고 낙서하는 게 대표적인 예시다.] 이러다보니 자신이 속한 조직에 해를 끼치는걸 모두가 극단적으로 자제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 영향 때문인지 일본은 모든 형태의 자치조직은 매우 강력한 규율성을 띤다. 한국에서는 학교발전기금을 후하게 내주는 후원회장의 자녀나 그저 교장이나 교직원들에게 이쁨받는 학생이 경력에 한 줄 추가이상이 되기 어려운 고교 [[학생회장]]일지라도, 일본의 경우에는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이 있다. 이 문제는 일본의 고질적 병폐인 작은 파벌들의 난립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동시기에 조선과 중국은 강력한 중앙 권력이 존재했기에 수많은 판관들을 파견했고 이들과 이들을 보조하는 [[아전]]들이 모든 형태의 분쟁을 중재하고 범죄를 단죄했다. 그런데 조선이나 중국도 아무리 많은 판관을 파견한다 할지라도 민간풍속과 상기한 백수건달,성추행범들을 처벌할 필요는 있었는데 이렇다할 명분이 없었다. 필요는 있는데 명분은 없는 이 풍속을 어떻게 통제했냐하면 [[오가작통법]]으로 통제했다. 다섯집을 한 통으로 묶었다. 이런 제도가 일본과 다른 것은 "촌주"를 정하지 않고 그저 연좌제의 일환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한집이 세금을 내지 못하면 나머지 네집에서 걷었고, 한집에서 살인자가 나오면 그 집은 물론 나머지 네집도 다 처벌해버리는 식이다. 일본도 오가작통을 도입하여 도나리구미(隣組, 이웃묶음)라는 제도를 만들긴 했는데 이미 고닌구미(5人-)라는 자치제도가 있었기에 이를 활용하는 형태가 된다. 결국 워낙 "촌주" 문화가 강해서 사실상 하부 자치조직을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고닌구미에도 구미초를 두고 이도 모자라 열집을 묶어 쥬닌구미라는 것을 만들어 구미쵸를 두는 식으로 대표자를 꼭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오가작통의 실시이유인 연좌제 처리를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대표자를 처벌하는 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그 대표자들이 알아서 상류계층인 무사들이 나서기전에 주민을 통제해야만 했다.[* 사실 조선도 처음 도입때는 통주를 두고 문제가 생기면 통주를 처벌하는 형식을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통주가 통원들에게 행사하는 일정한 권력을 인정해야만 했다. 말 안 듣는 문제 통원을 제지할 힘을 줘야 "니가 알아서 정리했어야지"라며 벌을 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일본과 달리 한국과 중국은 중앙집중전통이 너무 강해 농민들의 자치조직에 대한 편집증적인 경계심이 있었기에 통주의 압력과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경우, 오가작통제가 잘 정착된 조선 후기가 되자 연좌제가 강화되는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봉행이 나설만한 일이 매우 드물었던 것이다. 오가작통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개념이었지만 고닌구미의 구미초에 해당하는 존재가 없었기에 일제강점기 시대에 와서야 [[통장(직위)|통장]]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런데 애초에 양국의 문화가 다르다보니 한국의 통장은 일본의 통장처럼 주민자치조직의 리더라기보다는 나라의 하급 심부름꾼인 [[아전]]이 하던 일을 계승하고 있다. 이런 제도들은 동아시아 국가 문화에 짙은 명암을 남겼는데, 옆집에 살인자가 나오면 우리집도 처벌받다보니 남의 집에 간섭하지 않을 수가 없어 한국이나 중국은 지인에 대한 [[오지랖]]이 상상을 초월하고 일본이나 서구인들 측면에서보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의 집에 턱턱 들어와서 매우 무례할 정도로 간섭해대는 문제를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이 [[메이와쿠]]라는 문화의 특징상, 굳이 잘할 필요 없이,[* 리더가 아닌 사람이 뭔가 너무 지나치게 잘하고, 남에게 너무 베풀면, 해당 조직 리더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무례가 되므로 메이와쿠에 해당해버린다. 그러므로 진짜 쿠테타를 도모할 생각이 아니면 이러면 안된다.] 찍히지 않는 정도면 충분하기에 너무 잘난것도 못난것도 안되는,속된말로 "나대지 않아야한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한 민폐는 목숨걸고 삼가지만, 다른 조직이나 국가의 구성원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고, 동시에 남에게 불필요한 관심을 보이지 않게되는 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한국의 심리학교수가 일본에 강의를 하러가서 문화적 쇼크를 받았던 것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상대방의 개인정보를 묻질 않기 때문에 10년간 같이 매주 1~2회씩 세미나를하고 밥도먹은 일본인 교수들끼리 서로 아무도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황당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메이와쿠의 개념에서 보면 오히려 남 앞에서 서로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노골적으로 황당해하는 행동은 다른 일본인들 전부를 불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행동을 하면 찍히는 것이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한국인들은 예의를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고,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일본인들은 매정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이러한 문화는 개인의 공적인 역할 외의 생활에는 일절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오타쿠]] 같은, 집단에 드러나지 않는 문화가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걸 각국가에게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한국이 개인 사이의 관계가 이어지며 집단이 되는 것이라면 일본은 개인의 역할에 더 집중하고 역할에서 벗어나 집단을 어그러뜨리는 일을 극도로 삼간다. 라고 할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