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인물 (문단 편집) == 반전주의자 == * 엔도 사부로(遠藤三郞) 포병 대위로 재직당시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조선인에 대한 린치를 막기 위해 경찰, 헌병대에 도움을 청하고 자기 부대에 그들을 보호할 것을 명했으며 살인을 저지른 이들에 대해 재판을 상부에 요구했으나 상부가 이를 오히려 은폐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불복했다 결국 프랑스로 떠났다. 귀국 후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에 만연한 타락을 지켜보고 이를 안타깝게 여겼으며 항공병과로 옮겨 장성으로 진급한 뒤 [[할힌골 전투]] 후 '소련과 싸울 수 없으니 일단 전선을 유지하는데 주력하자'고 했다가 대본영으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중경 대공습에도 극도로 부정적이었는데 전쟁에 있어서 불필요한 생명의 희생은 극구 반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말기 오니시 다키지로와 함께 공군의 창설에 노력했지만 결실을 맺기 직전에 패전하였고 극동 전범 재판에 출두하여 1년 동안 수감, 심문을 받고 석방되어 예전에 근무한 사이타마 육군비행학교 부지로 돌아와 농민이 되었다. 전쟁 후에는 반전운동가가 되어 일본군에 대한 여러 증언을 할 뿐만 아니라 [[평화헌법]] 준수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헌법옹호 국민연합 등 시민단체를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말년을 보냈으며 1956, 57년 [[마오쩌둥]]과 중일 회담당시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석, 면담하기도 했다. 그 뒤 1961년 중일우호 전직군인회를 조직하여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당사자의 강연 등을 전국적으로 실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http://ja.wikipedia.org/wiki/%E5%A0%80%E6%82%8C%E5%90%89|호리 데이키치]](堀 悌吉, 1883.08.16 ~ 1959.05.12) [[파일:external/www.ww1-danro.com/horiteikichi.gif]] >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 그 자체는 악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시초는 [[가토 도모사부로]]였다. 호리 본인도 가토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호리는 당연히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에 속했다. 1930년의 [[런던]] 군축회의에서 보조함의 비율은 미국 및 [[영국]]과 비교해 7할은 필요하다는 함대파의 의견이 해군 내부에 강경했을 당시 군무국장이던 호리 데이키치는 '영미와 전쟁보다는 타협한다'라는 견해를 보이는 조약파의 일원이었다. 결국 타협에 성공하여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공로로 호리는 중장으로 승진되지만 이듬해 함대파가 해군성을 장악한 상태의 인선에 휩쓸려 결국 압박을 받고 예비역으로 강제 편입되어 버렸다. 이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펄쩍 뛰었을 정도. 하지만 호리는 날뛰는 그를 말리고 난 뒤 예비역으로 편입조치를 받아들이고 민간인으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