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인물 (문단 편집) === 관료와 정치인, 외교관 === * [[나가타 테츠잔]] [[도조 히데키]]와 함께 통제파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수재로 군무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 장래의 일본 육군 대신으로 거론되는 거물급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 육군 대신이자 후에 조선 총독이 되는 [[미나미 지로]]와 함께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의 근원인 국가 총 동원령을 발령한 인물이다. 그러나 육군성 군무국장 재직 중 파벌 사건으로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게 1935년 살해된 인물이다. 그가 살해된 후에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 [[http://ja.wikipedia.org/wiki/%E6%9C%AB%E6%AC%A1%E4%BF%A1%E6%AD%A3|스에쓰구 노부마사]](末次信正, 1880.06.30~1944.12.29) [[파일:external/cache5.amanaimages.com/23007004339.jpg]] [[일본 해군]] 잠수함의 실력을 상향 평준화한 인물. 전술가. 군무에는 화려한 업적을 보여주었으나 정치계로 개입하여 군이 정치에 간섭하는 문제에 도화선을 당긴 주범. 군령부 부총장시절 군축조약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격한 논지를 펴다가 경질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함대파가 일어서긴 했지만 그의 사상 자체는 함대파를 능가하는 과격함 때문에 과격파 내부에서조차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 얼마나 과격했으면 [[쇼와 덴노]]조차도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 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으나 새로 총리가 된 [[고노에 후미마로]]의 비호를 받고 군령부 부총장으로 복직 후 다시 정치에 날뛰었다. 고노에는 처음 스에쓰구를 내가 똘마니로 삼을 수 있다고 속으로 흐뭇해하고 그의 비호세력이 되었으나 실패. 되려 그에게 휘둘렸다고 한다. 그는 중일전쟁이 악화된 원인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영국, 소련과 외교적으로 압박하여 고립 될 것을 주장하고 "남방이 확보된다면 자급자족 체제를 강화시켜 장기에 걸쳐 일본의 체제를 강화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심지어 그의 직속상관이나 다름없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조차도 "그 놈은 글렀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주변의 빈축을 산 상태였다. 고노에 내각 해산 후 [[도조 히데키]]와 함께 총리 후보로 올랐으나 결국 패배. 또 군령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총장 직위에 앉고 싶어서 안달하였으나 쇼와 덴노의 미움을 살 대로 산 터라 결국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쓸쓸히 자택에서 사망. * [[http://ja.wikipedia.org/wiki/%E8%8D%92%E6%9C%A8%E8%B2%9E%E5%A4%AB|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1877.05.26~1966.11.02) [[파일:external/www.mext.go.jp/main_053.jpg]] 황도파의 거두로 황군이라는 말을 공식석상에서 자주 사용한 인물이다. 이게 기행으로 보일 여지가 있는 게, 공식 석상이나 언론에서는 대일본제국 육군, 해군 또는 제국 육, 해군이라 불리었지 황군이라는 명칭은 잘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도파는 [[2.26 사건]]으로 몰락했지만, 1938년 고노에 내각 집권 당시 문부대신으로 발탁되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시 세뇌교육을 주도하였다. 또한 "국민정신 총동원 위원회"의 위원장도 겸임하여 사상면에서 전시체제의 선전작업을 추진했다. 전쟁수행 내부책임자라는 이유로 A급 전범으로 심문받았고, 결국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복역한다. 복역중 1955년 병으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여 전국을 돌며 강연활동을 하였는데, 1966년 강연 활동을 하던 중 심장병으로 90세에 사망했다. * [[아나미 고레치카]] 패전 직전 당시 육군 대신. 인품이 후하다고 알려졌지만 [[중일전쟁]] 당시 저지른 사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정신론에 유난히 경도된 전형적인 일본군 장성이었다. 일본이 패망해 나갈 무렵 아나미는 군부를 대변하여 무조건 항복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참전 이후에도, 그는 유리한 항복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본토 결전을 주장하였다. 이에 [[히로히토]]가 종전에 동의하자 그제서야 본토 결전의 주장을 굽혔다. 그러나 그 직후 [[할복]]을 했는데 이 점이 유일한 그의 업적이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아나미 고레치카가 할복하지 않고 살아서 궁성사건에 적극 개입했다면 정말 옥음방송은 연기되었거나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나름]] 업적은 맞긴 하다. 그가 자살할 때 입었던 제복과 유언장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이다. * [[https://ja.wikipedia.org/wiki/%E8%8D%89%E5%88%88%E8%8B%B1%E6%B2%BB|쿠사가리 에이지]](草刈英治, 1891년 6월 1일 ~ 1930년 5월 20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usakari_Eiji.jpg|width=350]] 해군의 팽창을 구속하는 군축조약의 극렬 반대자. 자신의 뜻과 반대로 조약이 체결되자 크게 실망하여 1930년, 군축회의 전권대표 중 한 명인 해군대신 다카라베 다케시가 승차했던 차 안에서 지니고 있던 단도로 자결했다. 쿠사가리는 단도가 복부에 박힌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아직 숨이 붙어있던 그는 "손대지 마라! 칼은 무사의 혼이다!"를 외치며 단도를 빼내길 거부했다. 그 상태로 얼마 뒤 죽었는데 그의 죽음은 "군축조약에 대한 죽음의 항의"로서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이는 이후 통수권의 간섭문제로 발전해 당시 육해군 할거없이 퍼져있던 과격파 청년장교들과 국가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간사한 기만책에 휘둘리지 않은 쿠사가리의 우국충정을 보라!"라며 영웅으로 추앙하기도 했다. * [[도고 시게노리]] 일본 외무대신으로 특히 태평양전쟁기에는 대외에 유명했었다. 항목 참조. * [[시게미쓰 마모루]] [[윤봉길]] 의거로 다리를 잃은 이후 일본 항복 조인식에 나선거로 유명한 일본 외무대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영어로 응수하며, 7년형을 선고받는다. * [[가세 도시카즈]] 일본 제국은 물론 전쟁 이후 일본국에서도 외교관을 역임하였다. 인지도는 별로 없지만, 진주만 공습 당시 이른바 '[[대미각서]]'라 불리는 선전포고문 작성에 관여한 외교관들중 한명이였으며, 종전 당일 미주리(전함) 선상의 일제 항복 조인식에 참여한 [[시게미쓰 마모루]] 이하 일제측 사절단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전후에서는 초대 유엔대표부 특명전권대사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20세기말 일본 우익논객의 새 거두로 서게되는 가세 히데아키가 되겠다. 그에 대해서는 [[일본 우익사관/학자]]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