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도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panese_straight_swords_6th_7th_century_Kofun_period.jpg|width=100%]]}}} || || 일본 [[환두대도]] 유물 || 원래 [[일본]]에서는 타 동아시아 나라가 그렇듯 [[환두대도]]가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변화를 거쳤고 그 중 일본도의 원형이 되는 "타치(大刀, 太刀)"가 등장한다. 이때의 환두대도는 주로 한손검인 해외 환두대도와 달리 양손으로 사용하는 유물도 많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1589447177541339.png|width=100%]]}}} || || 일본 [[정창원]] 소장 흑작대도(黑作大刀)[*제원 총길이(全長): 89.1cm, 손잡이길이(柄長): 16.2cm, 칼집길이(鞘長): 69.8cm, 도신의 날길이 (刃長): 65.6cm, 휨(反り): 0.1cm, 자루부분 날폭(元幅): 3.7cm, 도신의 자루길이(莖長): 14.5cm] || 다만, 양손검이지만 모양은 한손으로 사용하는 직도의 형태였으며 날 길이도 70cm가 채 못 되는 짧은 도검들이었다. [[쇼토쿠 태자]]의 그림[* 하지만 쇼토쿠 태자 자체의 그림을 보고 이것이 당시 타치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왜냐면 [[백제]]의 아좌태자가 그렸다는 전승이 있지만 실제론 1069년 하타노치테이가 秦致貞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쇼토쿠 태자의 그림에 쇼토쿠가 쓴 관이나 복장이 [[아스카 시대]]가 전혀 아니며 복장과 관이 적어도 8세기 이후의 [[나라 시대|나라시대(奈良時代)]]이기 때문에 쇼토쿠태자의 그림은 [[헤이안시대]] 이후 또는 1069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을 보면 칠성검이나 일반 병사용으로 사용된 흑작대도(黑作大刀) 등이 이 시대의 군용 일본도로 보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2414A34D24.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456sfd.jpg|width=100%]]}}} || || 일본에 있는 당대도 유물과 복원품 || * 당대도 기원설: 당대도가 일본도의 기원이라는 [[https://www.quora.com/Is-it-true-that-the-Chinese-predated-a-lot-of-Japanese-things-such-as-the-Katana|주장]][[https://www.x-swords.com/How-to-distinguish-the-Chinese-Tang-Dao-from-the-Japanese-samurai-sword|주장2]]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고, 종종 [[http://www.handm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78|한국의 문화지 기사]]에도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90811251435617|그런 주장]]이 인용되는데, 정작 다른 여러 나라의 학자/학예사 중에서 정식으로 당대도를 일본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아마도 여러 종류의 중국발 역사왜곡 중에 하나인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에 남은 당대도의 유물은 곡선이 전혀 없는 데다가 일본에서 보관 중인 당대도 유물은 끝 부분이 펄스엣지, 즉 양날이지만, 일본도는 도신 자체가 곡선인 외날 도검이다. 다만 이는 일반적인 당대도의 모습이 아닌 장식성이 강한 일종의 레어한 모습으로 당대 중국 본토 대부분의 당대도 유물은 일반적인 도 형태다. 현재 견당사가 가져온 당대도(唐大刀)의 레플리카가 일본에 존재한다. 일본도의 전신인 타치의 외장 금구와 손잡이의 어피등 장식성에서 상당한 영향 끼친 것으로 보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Kazari-tachi_Style_Sword_Mounting,_Heian_period.jpg|width=100%]]}}} || || 헤이안 시대의 飾太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ss021.jpg|width=100%]]}}} || || 일본국보 게누키가타타치(毛拔形太刀) || 환두대도와 당대도를 쓰던 일본은 추정으로는 9세기, 유물로 보면 10세기에 일본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타치가 등장한다.[[https://ja.wikipedia.org/wiki/%E5%A4%AA%E5%88%80|링크]] 이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타치는 10세기에 만들어진 게누키가타타치(毛拔形太刀)[[https://ja.wikipedia.org/wiki/%E6%AF%9B%E6%8A%9C%E5%BD%A2%E5%A4%AA%E5%88%80|링크]]인데 휘어진 칼날과 둥근 칼코등이(쓰바. 정확히는 아오이가타) 등 나중에 등장할 일본도의 형상을 갖추었다. 게누키(털뽑기)라는 이름은 이 손잡이 중앙에 파여진 구멍이 당시의 털 뽑는 기구와 비슷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7-8세기 때는 도호쿠 지방 국경선 너머로 준동하는 [[원주민]]인 [[에미시]]들과 조정간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로 이 때 에미시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기동력을 갖춰 전쟁을 했고, 그들이 사용하던 도검을 일본의 무사들이 도입해 마상전투에 걸맞게 휘어진 칼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제가 붕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군단제가 포기되고 지방관아의 자제로 구성된 건아(健兒)제도로 병역제도가 변경되며 자연히 소수정예의 형태로 군사제도가 변화되면서 도검의 형태도 무사들이 사용하는 휘어진 형태로 정착되어간다. 헤이안 말기-겐페이 시대에 이르면 일본도는 18~23cm의 짧은 손잡이를 금속 박판으로 위아래를 덮고 옆에는 어피를 붙이고 80cm 이상의 긴 칼날을 가진 마상용 도검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http://pds26.egloos.com/pds/201804/06/02/c0063102_5ac762a116b8c.jpg|#]] [[http://egloos.zum.com/zairai/v/5906248|##]] 이런 타치(大刀)의 발전 과정 중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여겨져, 이를 와라비테타치와 연관지으려는 시각도 있으나, 이미 더 이전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한반도]]식 [[환두대도]]를 가져와 쓰던 일본 직도 대도 단계부터 손잡이가 조금씩 뒤로 꺾인 것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환경에 맞게 서서히 형태가 변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도의 시작을 에미시 등 동부 원주민의 칼과 연관지으려는 시도도 활발하지만 애초에 그쪽의 도검류는 손바닥만한 칼날에 앞굽이가 심한 손잡이 등 타치의 원류와는 심하게 동떨어진 외형과 제법을 하고 있다. 제강기술과 강철검 제법이 심각하게 비틀린 다른 루트로 들어왔다는 주장 자체에 무리가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781a229fb1fa3e6aab327573c9ef3ef4.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heiahn sword.jpg|width=100%]] }}} || || [[헤이안 시대]] 시대의 일본도 도신과 도검 ||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제]]가 붕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군단제가 해체되며 병역도 지방 관아의 자제로 구성한 건아(健兒) 제도로 바뀌는 등 군사제도가 소수정예로 바뀌자, 도검 역시 말탄 무사들이 사용하기 좋은 휘어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헤이안 말기-겐페이 시대에 이르면 일본도는 길이가 18-23 cm인 짧은 손잡이를 금속 박판으로 위아래를 덮고 옆에는 어피를 붙이고 칼날이 80cm 이상으로 긴 마상용 도검이 주를 이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external/www.tnm.jp/LL_C0035231.jpg|width=100%]]}}} || || 가마쿠라 시대의 효고구사리다치(兵庫鎖太刀) || [[가마쿠라 시대]] 말기가 되면 산과 들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지물을 이용하는 습격과 매복이 잦아졌기 때문에 기존의 기마궁시 전법은 입지가 줄어든다. [[몽골]]과의 전쟁이나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부 수립에 관여한 악당(惡黨)의 전법 등 과거에 비해 도보 지상전의 비율이 늘어났다. 또 고다이고 신정부가 붕괴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여 [[남북조 시대]]에 60여 년간 내전을 벌이는 동안, 도보전이 확대되고 갑옷도 도보전에 알맞게 도오마루(胴丸), 하라마키(腹卷)로 대세가 변하였다. 또 팔이나 다리 부분을 더욱 철저히 방어하였기 때문에 실전용 타치는 자루에 끈을 감아 쥐기 좋고 땀을 흘려도 흡수되어 미끄럽지 않도록 하였다. 우리가 아는 일본도의 모습은 거의 이때 정립된다. 또 갑옷이 중장화하자 금쇄봉 같은 타격무기가 활용도가 늘어났고 [[나가마키]], [[오오타치]]와 같은 커다란 도검들도 많이 쓰이는 등, 이 시기에는 일본도가 전체적으로 크고 무거워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A109_1.jpg|width=100%]]}}} || ||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도[[http://www.nosyu-token.jp/shinken/vol_28/A109.htm|링크]]. 외장은 에도 시대 것이다. || 견해에 따라서는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도를 이후의 전국시대보다 더 우월하게 보고, '''일본도의 절정기'''를 무로마치 시대로 보기도 한다. 전국시대에는 오히려 [[조총]] 등의 등장으로 일본도의 전술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질적으로도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무로마치 말기에 들어 [[오닌의 난]]과 같은 내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기마무사 소모는 많아지는 데 비해 기존의 기마무사의 공급은 점차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말 없이 걸어다니는 하급무사, 뒤이어 아시가루들이 전쟁의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이들이 사용한 것이 바로 '''카타나'''라는 일본도로써 주요 특징은 타치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의 도검으로써 패용 장치가 없이 허리춤에 끼우고 다녔고 칼날도 2척 1촌(63 cm) 정도로 짧으며 한 손으로 쓰기 적당한 칼이었다. 정확한 것은 [[우치가타나]] 문서 참조. 이러한 카타나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건설하여 천하인임을 표명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보전이 일반화된 전쟁 환경을 감안하여 기존의 타치를 대체하여 사용되게 되고 전체적인 스펙도 타치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이 즈음에는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장식을 통일해서 한 세트로 차고 다니는 것도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다이쇼 코시라에, 또는 니혼자시로 부른다. 또 기존의 타치를 패용 장치를 제거하고 카타나의 쿠리카타를 붙여서 허리에 끼워서 차고 다니는 한다치(半太刀) 양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식성에서 워낙 우월했기 때문에 카타나라도 한다치의 양식을 모방해서 만들기도 하였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지나치게 긴 칼을 금지하고 날 길이의 기준을 정했다. 일단 하바키를 제외한 날 길이 기준으로 1척(30.3 cm) 이하는 단도, 1척 이상~2척 미만은 와키자시, 2척 이상은 카타나로 규정했다. 또 카타나의 날 길이는 2척 3촌(약 69cm)를 넘기지 않도록 규정했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고 다닐 수 있는 검의 크기에 대한 제한이였고, 공연용 소품이나 신사에 봉납되는 용도 등으로 이후로도 저 규정보다 큰 칼이 제작된 사례가 있다.] 그래서 기존의 타치를 갈아내서 날 길이를 맞춰 패용하고 다닌 경우도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신분의 상징으로 무사가 항시 패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실전이 없어지고 일본도에 대한 관념이 의식화되고 장식적인 것이 호평을 받으면서 일본도의 여러 부품에 화려한 투각이나 문양이 새겨지거나 다양한 디자인들이 선보이게 된다. 현대 일본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카타나에 실전용 외장과 보관용 시라사야를 따로 만든다거나 정비할 때 도침(칼베개)를 이용해서 뉘어놓는 등의 문화가 죄다 이 에도 시대에 정립된 것이다. 물론 히고나 사츠마 코시라에처럼 실전적이고 투박한 것도 있었지만 대세는 보다 가볍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었다. 에도 시대 초기 때는 직도 형태의 일본도가 약 80년간 유행을 한적이 있었다.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난 세대들 중에 카부키모노들이란 소위 양아치 집단들을 중심으로 휘어진 형태의 일본도가 아닌 직선 형태의 일본도 및 화려한 장식이 달려있는 일본도가 유행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실용성은 전혀 없으며 오로지 장식품의 용도로만 쓰였다. 이때 수많은 곡선 형태의 일본도들이 직선 형태로 개조되었고, 이들 중엔 이름있는 명도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위에 언급된 것처럼 칼의 규정이 생기면서 직도 및 화려한 장식이 된 검들은 전면 금지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78px-Samurai_with_sword.jpg]]}}} || || 1860년 에도막부 말기 일본도를 휘두르는 사무라이의 모습 || 에도 시대 말기에 이르러 [[쿠로후네 사건]]과 같은 서양 세력의 침공과 교전이 자주 벌어지면서 막부측은 강무소(講武所) 등을 세워 신식 전술을 교육시키는데, 서양인들이 총기에 의지하여 백병전에 무지할 거라 생각하고는 창술이나 검술을 정립해서 가르쳤다. 또 이때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서 당시 횡행하던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하던 이른바 유신지사들이 테러나 암살을 반복했으므로 이에 대항한 [[신센구미]]와 같은 조직들이 창설, 일본도로 시가지에서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이때에는 서양 도검과 서양전술의 영향을 받아 그에 걸맞게 개량된 돗페이(突兵)코시라에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유럽식의 [[행어]] 패용 방식을 따라 서양식으로 패용하기도 했다. 칼자루가 뒤로 가게 하거나 등에 지고 다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무진전쟁]] 때에는 주로 총포를 이용한 전쟁이 벌어졌지만 간혹 도검을 이용해 돌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검 사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4~5kg에 달하는 당시의 소총으로 총검술을 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상당한 부담을 느껴서라고 한다. [[서남전쟁]]에서는 화력이 딸리고 총탄이 부족한 사츠마 군대의 무사들이 일본도를 이용해 [[발도 돌격]]을 수행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평민 장정으로 구성된 당시 일본 정부군이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결국 정부군 측에서도 무사들로 구성된 경찰 [[발도대]]를 투입해 칼에는 칼로 맞서게 되었다. 서남전쟁은 구시대의 산물로 무시된 일본도가 다시 실전력을 증명한 전쟁으로써 이후 일본은 검도를 제정하고 실전군도를 제정하는 등 백병전을 다시 고려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에는 16식 해군장교도, 19식 육군장교도(둘 다 세이버)의 양식을 유지한 채로 일본도 칼날을 끼우고 양손으로 쥐는 손잡이를 장착한 [[양손세이버]]가 실전군도로써 사용되었다. 1934년에는 [[초국가주의]] 열풍으로 일본도 타치 양식을 갖춘 [[신군도]]가 등장한다. 1945년 종전 이후 일본도들은 죄다 회수되어 폐기될 위기에 처했으나 전통 공예품이란 측면을 강조하여 겨우 살아남았다. 일본은 날 길이가 15cm 이상인 날붙이를 무기로 규정하고 소지를 금하지만, 일본도는 전통공예품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소지와 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일본 제국 시대에는 총검을 자주 사용하였지만 상하이, 난징과 같은 일본 제국군에 정복된 곳에서는 중국인들을 향한 '[[100인 참수 경쟁|100인 베기]](100人切り)' 등 [[전쟁범죄|일본 제국군의 장난과 놀이]]로 일본도가 사용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군들이 주둔하던 난징에선 중국인을 놀이로 처형할 때 이 일본도로 목을 잘라 처형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21.egloos.com/c0063102_51e2e7e901975.jpg|width=100%]]}}} || || 미국 뉴올리언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에 전시된 [[98식 전도]]와 미군 철모.^^([[http://egloos.zum.com/zairai/v/5756222|출처]])^^[br]전후 철모 주인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 장교가 일본도로 자신의 철모를 내리쳤지만 사진과 같은 흠집밖에 안 났고, 당황하는 틈을 타 철모 주인은 자신의 [[총검]]으로 손쉽게 장교를 물리치고 일본도를 노획했다고 한다. || 물론 태평양 전선에서도 [[반자이 돌격|줄기차게 쓰였다]]. 이때는 대부분 94, 98, 3식 군도가 사용되었지만, 가끔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물을 사용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해방 전후에 이런저런 경로로 노획하여 사용한 사례가 있는 듯하다.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D%BC%EB%B3%B8%EB%8F%84%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47-01-01%22%2C%22endDate%22%3A%221947-12-31%22%7D|참고]] 해방 후 테러, 강도질은 물론 국군이나 빨치산이 사용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