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사회당(1945년) (문단 편집) === 통일 === 1951년 분열 당시 좌사당이 중의원 16석, 우사당이 중의원 30석을 가져가면서 원내에서는 일시적으로 우사당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활동가들-노조와의 연결로 선거 기반이 단단했던 좌사당은 1955년 총선거에서 89석을 획득한 데 반해 우사당은 불과 67석에 그치면서 불과 4년 만에 좌사당 우위로 돌아섰다. 특히 이 시기엔 좌파의 주 구성원들이었던 활동가들과 노조 출신 의원들이 대거 의회로 진출해 이른바 "사회당-총평" 블럭의 정치 역학이 확립됐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 활동가층이나 총평과는 거리가 있던 집단, 이를테면 와다파 등 정책통들은 스즈키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면서 마찰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우사당의 내부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했는데, 본디 우사당은 우파의 강화 찬성, 안보 찬성 입장에 중간파가 강화 찬성, 안보 반대라는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이를 전제로 양 당파의 협력이 성립되었었다. 그런데 자위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떠오르자, 원래 안보조약에 찬성이었던 우파는 재무장에 찬성으로 돌아섰고, 중간파는 반대로 재무장 반대를 주장했다. 더군다나 아사누마 서기장은 우사당을 중간파 천하로 꾸렸으나, 대정익찬회 등 전시정책에 협력한 책임으로 공직 추방을 당했던 가와카미 조타로가 추방이 풀리자마자 중간파의 수괴가 되어 우사당의 위원장이 되었으며, 산업보국회의 이른바 "산보-인민전선파"의 지도자로서 노동자 강제 동원에 봉사한 미와 쥬소는 우사당의 정치자금책이 되었다. 이렇게 중간파가 우사당 지도부를 독점하고 있던 상황에서 좌사당에 비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내자 우파가 중간파를 추궁하는 약점이 되었다. 한편 양 사회당의 밖을 돌아보면, 그간 장기집권한 요시다는 독재적인 정치로 국민들의 싫증을 불러와 54년 끝내 실각했고, 반대로 오랫동안 반요시다 투쟁을 한 하토아먀는 전국적인 기대를 한데 모으면서 자유당 하토야마파, 하토야마 자유당, 개진당 등 삼파를 합동시켜 [[일본민주당(1954년)|민주당]]을 창당했다. 과연 민주당은 1955년 총선거에서 121석을 185석으로 불리며 대승했고, 반면 요시다의 퇴진으로 정권을 내준 자유당은 185석을 112석으로 말아먹었다. 그런데 의석 수의 변화를 잘 보면, 민주당이 대승했다고 하는 선거 결과도 사실은 아무런 외연 확장도 하지 못한 체 그저 보수정당 내에서 서로 의석 수를 바꿔먹은 것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양 사회당의 선전으로 의석 수가 야금야금 줄고 있었다는 점이 보인다. 따라서 이런 분열상에서는 양 사회당이 통일될 경우 그 시너지까지 고려한다면 의회 단독 과반수까지는 못하더라도 제1당을 노려볼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1955년 사회당의 통일은 이런 고려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즉 좌사당의 지도 세력인 스즈키파와 우사당의 지도 세력인 중간파가 합동을 주도함으로서 자신들을 통일사회당의 주류로 고착화시키고 당 지도의 난맥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하던 좌파와 중간파의 노선을 통일사회당의 노선으로 관철함으로써 재무장에 찬성하는 우파를 억제하고 비무장중립론을 당의 영원불변한 입장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당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 양당의 정립은 통일사회당에게 원내 다수당의 기회를 열어주고, 장기적으로는 연립내각으로서 정권 참여 가능성까지 내다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