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정부전용기 (문단 편집) === 일본정부전용기 도입까지의 이야기 ===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일본 황족과 수상, 관료의 해외 공식방문이나 국내이동 시에는 반관반민의 경영체제였던 [[일본항공]]의 특별기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 예로 [[1954년]] 8월 [[홋카이도]]에서 열린 [[국민체육대회]] 개회식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를 위해 최초의 황족 대상 특별기로 [[맥도넬 더글라스|더글라스]] DC-4가 치토세-하네다 공항 사이를 운항했다.[* [[홋카이도]]로 가는 길에는 황실 전용 열차와 [[세이칸 연락선]] 토야마루(洞爺丸)가 이용되었다.] 이후로도 특히 해외 공식방문 시의 특별기로는 당시 일본 항공사 중 유일하게 국제선을 운항했던 일본항공의 기재가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최초의 국산 여객기 [[NAMC YS-11]]의 생산이 한창이던 무렵에는 이를 정부전용기로 삼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1969년]] 11월에는 당시 수상 [[사토 에이사쿠]]가 [[오키나와]] 반환 교섭을 위해 미국행에 나섰는데, 격렬한 반대투쟁으로 인해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국제공항]]으로 관용차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수상관저에서 하네다 공항까지 [[육상자위대]]의 [[UH-1#s-6.2|HU-1B]] [[헬리콥터]]가 사용된 적이 있다. 이것을 계기로 육상자위대 제1헬리콥터단에 창문이 크고 내부가 특별하게 만들어진 [[CH-46|V-107]] 1대가 배치되었다. 그러나 고정익 정부전용기가 실현되기까지는 시간이 더욱 걸렸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 말기 [[사이공 함락]]으로 재외국민 구출에 나선 [[일본항공]] 특별기가 출발했지만, 일본 정부의 요청에서 출발까지 이틀이나 걸려 [[필리핀]] [[마닐라]]까지 갔건만 오도가도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여기에 [[1970년대]]에 잇따라 발생한 [[적군파]]의 [[하이재킹|항공기 납치 사건]]에서도 정부전용기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 이르러 정부전용기 도입이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1978년]] [[6월 23일]]에 수상관저에서 열린 경제대책관료회의에서는 [[일본 엔|엔화]]의 가치가 계속 오르는 것에 대한 대책으로 달러를 소비하기 위한 긴급수입이 논의되었는데, 여기에서 당시 외무대신 소노다 스나오는 "총리나 관료의 외국 출장, 외국 귀빈의 수송, 유사시 해외동포 구출을 위해" 정부전용기로 [[보잉 707]] 2대를 구입하자고 발언했다. 같은 달 30일의 경제대책관료회의에서 경제기획청 장관 [[미야자와 기이치]] 역시 "세계 주요국 대부분이 대통령/수상 전용기가 있으며, 외국 국가원수 사망 시의 특사 파견이나 재외국민 구출 등의 긴급한 경우에는 민항기로 시간을 못 맞추며, 민항기의 차터도 많은 경비가 든다" 등의 이유를 거론하며 정부전용기 구입을 주장했다. 당시 관련 부처([[내각부|총리부]], [[일본 외무성|외무성]], [[경제산업성|경제기획청]], [[국토교통성|운수성]], [[방위성|방위청]])의 과장 단계에서의 프로젝트 팀의 검토에 따라, 기종 후보로는 [[보잉 707]]과 더불어 [[보잉 747]], [[DC-8]], [[DC-10]], [[에어버스]] [[A300]], 록히드 [[L-1011]] 등이 거론되었다. 이 중에서 보잉 707과 DC-8은 소음이 커서, A300은 항속거리가 짧아서, L-1011은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보잉 747은 크기가 너무 커서 각각 곤란하다고 판단되어, DC-10이 유력 후보가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보잉]]이 중역을 일본에 파견하여 같은 해 8월 11일 기자회견을 실시했고, 여기서 보잉은 [[보잉 747SP]]는 [[DC-10]]과 가격이 거의 같으면서 성능이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맥도넬 더글라스]]는 [[DC-10]]이 [[에어 포스 원]]의 차기 후보일 뿐만 아니라[* 다만 최종적으로는 [[보잉 747-200|보잉 747-200B]]에 패했다.] [[일본항공]]이 이미 해당 기종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정비가 용이함을 어필했다. [[1980년대]]에 들어 미국과 일본의 무역마찰이 심화되자 미국 정부는 대일 무역적자의 축소에 고심했고, 이것은 일본 정부가 미국산 항공기를 정부전용기로 구입하는 이유가 되었다. 여기에 [[1951년]] 설립 이래 오랫동안 반관반민 경영체제였던 [[일본항공]]이 [[1987년]] 완전 민영화된 것도 결정적인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1985년]] [[3월]] 큰 사건이 터진다. 재외국민 구출을 위해 일본 정부가 [[일본항공]]에 전세기 파견을 의뢰했지만[* 당시 [[자위대]]의 군용기를 파견하는 것은 법률상의 이유로 불가능했다.] 파일럿과 객실 승무원 등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하면서 [[튀르키예]] 정부의 협력으로 파견된 [[터키항공]] [[DC-10]] 특별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자칫하면 이란 주재 일본인 215명이 완전히 위험에 처할 뻔했다.[* 여담으로 [[일본]]은 [[튀르키예]]의 이러한 배려를 [[1890년]]에 조난당한 [[오스만 제국]] [[호위함]] 에르투으룰(Ertuğrul)호 구조에 대한 보답으로 보고 매우 고마워했다.] 최종적으로 일본에서 중간 급유 없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주요 도시로 비행할 수 있는 당시 유일한 기종으로 보잉이 당시 개발 중이던 [[보잉 747-400]]의 도입이 [[1987년]] 각의에서 결정되어, 예비기를 포함한 2대가 도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