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일본의 당대 항해력 === 일본은 한반도 남부를 여름에만 약탈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실은 훨씬 훗날인 14세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에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왜구]]들 역시 여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고려를 약탈한 반면, 겨울이 되면 그 횟수가 거의 없어지거나 심지어 1350년부터 1375년까지 약 26년 동안 한겨울인 1월에는 아예 왜구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아래에 서술한 대로 겨울이 되면 대한해협에 역풍이 불어 일본에서 한반도로 오는 배가 항해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심지어 역풍에 배가 휩쓸려 침몰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http://cafe.daum.net/historywar/2LjP/1390|#]]] 선술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일본의 침략이 여름 특히 음력으로 4월부터 8월까지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적이라는 집단은 항구적으로 타 지역을 지배 할수 있는 능력도 없고 또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주체로 해석할수 없다. 해적은 단지 바다를 건너서 노략질을 일삼다 본거지로 돌아가는 집단들이다. 아래는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조법종 교수가 투고한 논문이다. (페이지 50~52쪽 참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파일:삼국사기 왜 침공1.png]] [[파일:삼국사기 왜침공2.png]] [[파일:삼국사기 왜침공3.png]] [[파일:계절풍.png]] 절기별 계절풍. 좌측 상단부터 우측 상단, 좌측 하단, 우측 하단 순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부는 계절풍이 다르다. 여름에는 일본쪽에서 한반도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쪽으로 바람이 분다. <삼국사기, 193년 6월> >六月,倭人大饑,來求食者千餘人。 >6월에 왜인(倭人)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294년으로 기록된 기사만 겨울로 되어있지 나머지 절기가 기록된 기사에서는 죄다 여름이거나 4월~8월이다. 또한 다른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2월에 대마도에 군영을 두고 군량미를 쌓아두고 신라를 호심탐탐 노리자, 신라가 정벌을 감행 하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 七年,春二月,王聞倭人於對馬㠀校勘 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我欲先其未發,㨂精兵擊破兵儲。舒弗邯未斯品曰,「臣聞『兵㓙校勘噐,戰危事。』」况渉巨浸以伐人, 萬一失利, 則悔不可追。不若依嶮設䦕, 來則禦之, 使不得侵猾, 便則出而禽之。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 䇿之上也。」 王從之。 > > 7년(408) 봄 2월에 왕이 왜인(倭人)이 대마도(對馬島)에 군영을 두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어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舒弗邯) 미사품(未斯品)이 말하기를,“신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고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남을 정벌하는 것은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오면 곧 그들을 막아서 침입하여 어지럽힐 수 없게 하다가 유리해지면 곧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정황상 대마도를 전진기지 삼아서, 준비하고 있다가 여름에 노략질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7세기의 백촌강 전투에서도 왜국의 군대는 4~8월까지 순차적으로 출정했지 겨울에 출정하지 않았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도 신화나 망상에 불과하지만 흥미로운점은 겨울10월에 출정했는데 이 기사를 쓴 사관이 이를 의식했는지 항해를 하자마자 풍신이 도와 훈풍이 불어왔다라고 신공황후를 신격화 시키는 기록을 했다. 즉 당대 일본에서도 한반도를 침략 할때 계절풍의 도움이 있는 여름에 출정해야 손쉽게 한반도 남부에 당도 할수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의 논문 참조 하자. 즉 계절풍을 이용해 침략하지 않으면 한반도에 자력으로 당도 할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왜구의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침략은 포로를 사로잡아 데려가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직접적인 통치를 하기 위해 침략한 것은 아니다라는게 중론이다.여담으로 만약에 광개토대왕비석의 신묘년 왜구의 침공 기사가 사실이라면 여름일 개연성도 매우 크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의 한국측 해석을 따르자면, 신묘년에 왜가 나타나자, 백제를 渡海破하였다고 해석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월에 고국양왕이 승하하고, 광개토대왕이 즉위한다. 그 해 여름 7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황해도 일대를 침공했고, 10월까지 여러곳에서 전선을 밀고 내려와 강화도로 추정되는 관미성을 빼앗았다. 7월에 백제의 군대에 왜구 용병들이 편입되어 같이 싸웠을 개연성은 적지만, 적어도 왜구가 신묘년에 쳐들어온 것은 서술 구조상 그 해 여름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부여곤지]]가 도왜에 소요된 기간은 2~3개월이다. 일본서기에는 부여곤지가 461년 4월에 파견 되었으며, 무령왕이 태어난 시기는 같은 해 6월1일이다. 물론 여름에는 일본쪽에서 한반도 방향으로 부는 계절풍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지만, 무령왕 또한 왜국으로 항해하는 중도에 태어났다고 했다. 정확히는 사가현 인근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완전히 당도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선 601년 기사에 급박하게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면, 백제의 경우에는 2-3개월, 고구려 같은 경우에는 더 많은 세월이 소요 되었을 것이다. 수나라 사신 배청이 왜국에 방문 할때도 삼국사기에는 608년 3월에 백제를 경유 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같은 해 4월에 일본에 도착 했다고 한다.] 또 일본은 당시에 중국 남조와 교류 할때 꼭 백제와 동행 하였는데, 물론 백제에서 황해를 건너면 바로 중국이므로 지리적 이점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백제의 선박에 동승하거나 얻어타고 같이 입조한 정황이 드러난다. [*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북조에 입조한 정황도 드러나는데, 이것은 육로를 통한 교류이고 또 광개토대왕이 신라 구원전에서 사로잡은 왜구를 데려와 왜국 사신처럼 꾸미고 고구려에 유리한 발언을 시켰다는게 중론이다. 문서 [[왜5왕]] 413년 기록에 대한 서술을 참고.] 예를 들자면, 왜5왕 중 한명인 武가 송나라 천자에게 보낸 서신에는 >道逕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고구려|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 즉 선술 했듯이, 왜의 항해술은 계절풍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통교 할때는 백제의 배를 빌려타고 온게 명확하다. 또 백제의 선박에 승선하여 동행했다는 간접증거로는 7세기에는 수나라에 서신을 보내려 파견한 왜국의 사신단이 돌아오는 길에 황제가 내린 국서를 백제인에게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다. 즉, 적어도 왜국의 사신단은 백제를 기착지로 삼아 머물러, 백제의 선박을 이용해 중국과 교류 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파일:nihonshoki23.png]] > 是日以飾船卅艘,迎客等于江口安置新館。於是以中臣宮地連烏摩呂•大河內直糠手•船史王平爲掌客。爰妹子臣奏之曰,臣參還之時,唐帝以書授臣。然經過百濟國之日,百濟人探以掠取。是以不得上。於是群臣議之曰,夫使人雖死之,不失旨。是使矣何怠之失大國之書哉。則坐流刑。時天皇勅之曰,妹子雖有失書之罪,輒不可罪。其大國客等聞之,亦不良。乃赦之不坐也。 > > 이 날에 장식한 배30척으로 객들을 강 하구에서 맞이하여 새로 지은 관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중신궁지련오마려(中臣宮地連烏摩呂;나카토미노미야도코로노무라지오마로) 와 대하내직강수(大河內直糠手;오호시카우치노아타히아라테), 선사왕평(船史王平;후네노후비토오우헤이)을 장객(掌客)으로 삼았다. 이때 매자신이 “신(臣)이 귀국할 때에 당제가 국서를 신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백제국을 지날 때 백제인이 찾아내서 탈취하여 갔기 때문에 이를 올리지 못합니다.”라고 주상하였다. 이에 군신이 의논하여 “무릇 사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무를 다하여야 한다. 이번 사자는 어찌 태만하여 대국의 국서를 잃었는가.”라고 말하고, 매자를 즉시 유형(流刑)에 처하였다. 이때 천황은 “매자가 비록 국서를 잃는 죄를 범하였으나 경솔하게 단죄할 수는 없다. 저 대국의 객들이 이것을 들으면 또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즉시 사면되어 단죄되지 않았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를 지배했다는 5~6세기보다 훨씬 후대인 8-9세기에도 항해력이 미천해 신라에게 선박을 구걸하는 등의 내용이 기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5~6세기에 대량의 병력을 어떻게 수송 했는지도 의문이다. <일본서기 639년> >秋九月,大唐學問僧惠隱•惠雲,從新羅送使入京。 >가을 9월에 대당(大唐)의 학문승 혜은(惠隱)과 혜운(惠雲)이 신라의 송사를 따라 입경하였다. <일본서기 654년 2월> >智宗,以庚寅年,付新羅船歸 >지총(학문승)은 경인년(690년에)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함 위 기사에서는 당으로 가는 길을 신라의 연안을 거쳐, 항해해 중국 내주(萊州)에 상륙한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지총이라는 학문승은 귀국하는 길에 신라 배를 타고 귀국했다. <일본서기 657년> >是歲,使使於新羅曰,欲將沙門智達•間人連御廐•依網連稚子等,付汝國使,令送到大唐。新羅不肯聽送。由是, 沙門智達等還歸。 >이 해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승려 지달(智達;치다치츠),간인련어구(間人連御廐;하시히토노무라지미우마야),의망련치자(依網連稚子;요사미노무라지와쿠고)등을 너희 나라에서 파견되는 사신에 딸려서 당에 보내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이 때문에 승려 지달 등은 돌아왔다. <일본서기 658년 7월> >是月,沙門智通•智達,奉勅,乘新羅船,往大唐國,受無性衆生義,於玄奘法師所。 >이 달에 승려 지통(智通;치츠)과 지달이 명을 받들어 신라의 배를 타고 당에 가서 무성중생의(無性衆生義)를 현장법사(玄奘法師)에게 배웠다. <속일본후기 812년 1월> >(弘仁三年春正月庚申朔)甲子 勅「大宰府去十二月廿八日奏云『對馬嶋言 今月六日 新羅船三艘 浮□西海 俄而一艘之船著於下縣郡佐須浦 船中有十人 言語不通 消息難知 其二艘者 闇夜流去 未知所到 七日船廿餘艘在嶋西海中 燭火相連 於是遂知賊船 仍煞先着者五人 五人逃走 後日捕獲四人 卽衛兵庫 且發軍士 又遙望新羅 每夜有火光數處 由玆疑懼不止 仍申送者』爲問其事 差新羅譯語幷軍毅等 發遣已訖 且准舊例 應護要害之狀 告管內幷長門 石見 出雲等國訖者 所奏消息 旣是大事 虛實之狀 續須言上 而久移年月 遂無所申 又要害之國 必發人兵 應疲警備 解却之事 期於何日 宜言其由 不得更怠 又量事勢 不足爲虞 宜令停出雲 石見 長門等國 護要害事。」 > > (弘仁 3년, 812, 봄 정월 庚申 초하루) 甲子 칙을 내려 “大宰府에서 지난 12월 28일에 아뢰기를 ‘對馬島에서 말하기를 이번달 6일에 신라배 3척이 西海에 떠 있다가 잠시 후에 그 중 1척의 배가 下縣郡 佐須浦에 다다랐습니다. 배 안에는 10명이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그 사정을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머지 2척은 어둠속으로 떠 갔는데 어디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7일에 20척의 배가 섬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횃불로 서로 연락하기에 마침내 그들이 賊船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표착한 사람 5명을 죽이고 5명은 도망해 달아났으나 후일에 4명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武器庫를 지키고 또 군사를 내었습니다. 또 멀리 新羅를 바라보니 매일 밤에 여러 곳에서 불빛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그치지 않아 사람을 보내어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그 일을 물어보기 위하여 신라어 통역관과 軍毅 등을 뽑아 보내도록 하고 또한 옛날의 例에 따라 요충지를 지키는 상황에 응하여 管內와 長門, 石見, 出雲 등의 나라에 알리도록 하라. 아뢴 바의 소식은 나라의 큰 일이니 사실인지 그렇지 않은 지의 상황을 계속하여 아뢰어야 하는데도 오랜 기간이 지나도록 아뢰는 것이 없다. 또 요충지의 나라들은 반드시 백성과 군사를 내어 경비하는데 피곤함에 대응하라. 경계를 푸는 날을 언제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마땅히 그 사유를 말하여야 하며 문득 게으를 수 없는 일이다. 또 일의 정세를 헤아려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면 出雲과 石見, 長門 등의 나라로 하여금 요충지를 지키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入唐求法巡禮行記 839년 3월 17일> >十七日。運隨身物載第二舩,与長判官同舩。其九隻舩分配官人各令舩頭押領押領,夲國水手之外更雇新羅人諳海路者六十餘人。每舩或七或六或五人。亦令新羅譯語正南商可畄之方便。未㝎淂否。 >개인 휴대품을 운반해 제2선에 싣고 장잠 판관과 함께 같은 배를 탔다. 그 9척의 배에 관인을 나누어 배치하여 각각 선두(船頭)로서 지휘 통솔하게 했는데, 본국의 수수 외에 바닷길에 익숙한 60여 명의 고용한 신라인을 통솔하였다. 이들은 각 배에 7명 혹은 6명 혹은 5명씩 배치되었다. 또한 신라인 통역 김정남으로 하여금 당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보게 했다. 그러나 아직 그 가능성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속일본후기 839년 8월 20일> > (八月庚戌朔) 己巳 勅大宰大貳從四位上南淵朝臣永河等 得今月十四日飛驛所奏遣唐錄事大神宗雄送大宰府牒狀 知入唐三箇船嫌本舶之不完 倩駕楚州新羅船九隻 傍新羅南以歸朝 其第六船 宗雄所駕是也 餘八箇船 或隱或見 前後相失 未有到着 艱虞之變不可不備 宜每方面重戒防人 不絶炬火贏貯糧水 令後着船共得安穩 其宗雄等安置客館 得待後船。 > > (8월 庚戌 초하루) 己巳 大宰大貳 從4位上 南淵朝臣永河 등에게 조를 내리기를 “이번달 14일에 말을 달려 아뢴 바의 견당사 錄事 大神宗雄이 大宰府에 보낸 牒狀을 받고서 당에 들어갔던 3척의 배는 원래의 배가 온전하지 못한 것을 꺼려 楚州의 신라 배 9척을 빌려 타고 신라의 남쪽을 거쳐 되돌아 왔는데, 제 6선이 바로 宗雄이 탄 배이고 나머지 8척의 배는 서로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면서 항해하던 중 앞뒤를 서로 잃어버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생스럽고 근심되는 變故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니 마땅히 모든 방면에서 지키는 사람들에게 거듭 경계시키고 횃불을 꺼트리지 말며 양식과 물을 저장하였다가 뒤에 도착하는 배들이 모두 무사할 수 있도록 하라. 그 宗雄 등을 객관에 안치하여 다음에 이를 배를 기다릴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속일본후기 840년 9월> > (九月癸酉朔) 丁亥 大宰府言 對馬嶋司言 遙海之事 風波危險 年中貢調 四度公文 屢逢漂沒 傳聞 新羅船能凌波行 望請新羅船六隻之中 分給一隻 聽之。 > > (9월 癸酉 초하루) 丁亥 大宰府에서 “대마도의 관리가 말하기를 ‘먼 바다의 일은 바람과 파도가 위험하고 年中 바치는 調物과 네 번 올리는 公文은 자주 표류하거나 바다에 빠진다’고 합니다. 전해 듣건대 신라 배는 능히 파도를 헤치고 갈 수 있다고 하니, 바라건대 신라 배 6척 중에서 1척을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를 허락하였다. [[파일:견당사.jpg]] 입당구법순례행기(17차) 839년의 기사를 보면, 아예 신라 번역관을 고용하여 , 신라인들을 고용하여 항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배가 파손 되어서 신라의 배를 임차해서 한반도 연안을 항해해 귀국했다. 사진에서 보듯이 왜국에서 중국으로 향할때는 보통 세 루트가 있었다. 북로는 고구려를 통한 항로로 7세기 이전으로는 고구려의 방해로 사용된적이 없는 루트이고 사진에는 없는 고구려를 통한 육로의 교류도 있다. 일본서기에 오나라에 공녀를 구하러 갈때 고구려를 통한 육로로 교류를 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왜의 여왕 히미코 또한 위나라에 조공하러 갈때 한반도의 대방군을 통하여 사신이 입조한다. 또, 선술했듯이 413년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그것이 진짜 왜국의 사절단이었다면, 고구려를 통한 육로로 북조와 통교를 한 것이다. 또 3세기에 규슈 일대를 다스리던 奴國王이 후한 광무제에게 받은 금표 또한 낙랑군에서 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 후한서 동이전 建武中元2년의 기록을 참조] 후한서에는 규슈 일대에서 정기적으로 낙랑군에 조공을 보내왔다고 기록 되어 있을만큼 오래된 루트 였지만, 5세기 이후로 왜왕 武가 송나라 천자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통교하는 길을 막고 해로 또한 장악 했으므로, 조공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남로의 경우에는 7-8세기에 개척된 루트이지만 여러번 조난 당하고 난파 되고 또 제주도에 있던 주민들에게 나포 당해 약탈 당하는 등 위험이 따르는 루트였다. [[정조(조선)|정조]]시대의 실학자 한치윤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 의하면 >왜는 대대로 晉과 宋에 조공하는데, 반드시 한반도를 경유했다. 국경을 달리하면서 길이 막히지 않이 한 것은 백제와 서로 결호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밝힌바가 있다. 왜왕 武가 언급한 루트는 대마도를 건너 제주도를 바라보며, [* 중국 수나라에서 쇼토쿠 태자의 과대망상적인 헛소리가 담긴 국서를 읽고, "황제는 왜황에게 묻는다(皇帝問倭皇)"의 내용의 국서와 함께 사신을 파견했는데, 수서에는 백제를 경유해, 탐라국을 바라보며 쓰시마섬을 거쳐 이키국을 통해 왜국에 당도 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9년 (608년)백제를 경유 했다고 기록 되어 있는 기사가 있다. 선술된 백제인이 수 황제의 국서를 강탈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동일한 사건이다.] 한반도 연안을 항해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기다려 황해를 횡단해 산동반도에 이르는 길이다. 실제 이시기는 고구려가 종종 백제의 중국과의 통교를 방해하기도 했다. 문주왕 2년 (476년), 동성왕 6년 (484년)에 파견한 思若思가 고구려군의 방해로 되돌아 왔다. [* 노중국 교수가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 투고한 5세기 논문 207쪽을 참고] 626년의 기록에도 백제가 당나라와 통교하고자 했으나 고구려가 방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27년(626)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명광개를 선물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당과의 교류를 막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뭐..당시 한강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신라는 당과 통교하기 수월했기 때문에 신라에 접근 했을수도 있지만, 9세기의 속일본후기의 기록을 보면 단지 지리적 근접도와 이점 때문은 아니고 신라가 당시에 왜구보다 앞선 항해력과 조선기술을 지닌 것은 명확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에 조선술을 가르쳐준 이나베(猪名部)라는 사람은 신라인이다. 신라인들의 당대 항해력은 상당히 수준 높았으며, 7세기에 백촌강 전투에서는 3만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상륙 시켰지만,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의 전제로 하는 4-6세기와는 시간적 거리도 멀고, 백제 기술자들의 덕도 과소평가 할수 없다.사실 신라에게 부탁한 것도 웃긴게 당시 신라는 백제 말갈 고구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상당히 수세에 몰렸었고, 백제 멸망직전 (660년)까지 신라는 대구인근까지 백제에게 내주며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한강이고 뭐고 당장 수도가 위협 받고 있는 상황에서 당나라로 파견하는 외교사절의 배를 얻어타려고 그것도 10년전에 김춘추가 외교사절로 찾아갔을때도 하대하던 그 신라에게 빌붙어서 당과 통교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이 자력으로 당나라에 견당사를 파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제 멸망과 나당 전쟁 이후에는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 때문에 한반도 연안을 거쳐 항해하는 것을 중단하고 남로를 개척했으나, 여러번 조난 당하고 난파 당하는 등 고생을 한다. 왜 하필 신라에게 부탁 했냐에 대해선 여라가지 학설이 있다. 백제는 처음엔 수나라, 당나라와 국교를 맺고 친선을 도모 했으나,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만만히 보던 고구려에게 연달아 깨지는 것을 보고, 우습게 여겨서 그 이후로는 중국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일례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침범한 것도 백제의 영토에 상륙하고나서 알았다고 한다. 또 왜국 측에서도 백제가 자신들이 당나라와 통교하는 것에 대해 고깝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 봤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고, 선술 했듯이 백제인이 수나라 황제에게 받은 국서를 탈취하기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냉각기를 갖는다. [[파일:백제 멸망전 영토.jpg]] 또한, 임나일본부설이 존재 했다고 전해지는 4-5세기보다 훨씬 후대인 백강전투의 왜국의 군사 수송선의 숫자를 총 파병 병력을 토대로 계산을 하면 한척당 25-30명[* 일본서기 554년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구원병을 요청하는데 왜왕이 1천명의 병력을 40척의 함선에 태워 수송 했다고 전해지며, 백촌강 전투를 봐도 배 한척당 탈수 있는 군인의 수는 25명 정도 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정도를 태울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 정도의 배 크기로는 4세기 경에 신라나 가야를 공격하여 점령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천에서 수백척의 배가 필요한데, 당시의 일본의 기술력과 국력으로 가능했겠냐는 반문이 있다. '한일공동역사연구회의 제1권 보고서'를 보면, 삼국사기의 신라측 왜군 대응 병력을 보면 200-300명이며 405년의 기사에는 살획한 왜병의 숫자가 300명임에 주목하며, '''일본이 신라와 가야를 지배할만한 군사를 수송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관산성 전투에서 왜국이 파병한 군인은 불과 1,000명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용병들이 도착한 시기는 554년 6월이다.] 추정컨데 왜구가 가장 근 큐모로 한반도 남부를 노략하거나 용병으로 참전한 경우는 상술된 삼국사기의 462년의 기록일 것이다. 왜구의 규모가 어느정도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신라측에서 포로로 사로잡힌 군사만 1,000명이라고 증언하고 있으니, 그의 수배에 이르지 않는가 하는 추정이다. 온전히 국력 규모에서 분석하자면, 왜왕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이 통일 왕조를 이룩 했다고 떠들던 시기는 5세기이다. 왜왕이 언론플레이와 허영을 부렸다고 파악 되긴하지만, 그의 말을 진실이라고 상정 해놓고 봐도 5세기에야 통일 왕조를 이룬 왜국이 어떻게 4세기에 그 많은 병력을 수송해 신라와 가야를 정복 했다고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그대로 믿을수 있냐는 백제사 전공자 [[노중국]] 교수의 주장이다. 어쨋거나 임나일본부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4-6세기보다 한참 후대인 9세기에 조차 신라인들의 선박을 얻어타고, 당과 통교하는 수준인데 4~6세기에 과연 가야나 신라를 정복할 만한 군대를 수송이 가능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