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수혁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69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지금의 [[서초구]] 지역)에서 아버지 임윤빈(任胤彬, 1937. 9. 5 ~ )[* 제5대 풍천임씨문하부사공파종회 회장, 제12·13대 풍천임씨승지공파종회 회장, 풍천임씨중앙종친회 부회장 고문, 2021년 신축보 발간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경애(姜敬愛, 1939. 9. 8 ~ )[* 강석일(姜錫一)의 딸이다.]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방배국민학교, [[강남중학교(서울)|서울 강남중학교]], [[서울고등학교 야구부|서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야구부|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88학번)를 졸업한 뒤 1992년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을 거절하고[* LG 트윈스에는 1990년에 입단해 한국 최고의 포수로 자리잡은 서울고 선배 [[김동수]]가 있었기에, 임수혁은 LG로 간다면 주전 확보가 힘들었으리라 판단했을 수 있고 고교 선배와 주전자리를 다퉈야 하는 처지를 피하려 했을 수도 있다. 만약 임수혁이 자신을 지명한 LG에 그대로 입단했다면 그의 중-고-대학교 1년 후배로서 훗날 [[이상훈(좌완투수)|야생마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어느 좌완투수]]를 이듬해인 1993년에 LG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LG는 라이벌인 [[두산 베어스|OB]]처럼 [[두산 베어스/팀 컬러#s-4|명포수 왕국]]으로 거듭났을지도 모른다.]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에서 군 복무를 한 후, 1994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1순위 지명을 다시 받아 프로에 데뷔하였다. 공격형 포수였던 그는 당시 롯데 주전 포수였던 [[강성우]]에 비해 수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입단 첫 해인 1994년에는 지명타자와 대타로 주로 활용되었으며, 시즌 동안 48타석밖에 기회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5년부터는 롯데의 고질적인 거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주전 포수로 나섰으며, 무려 15홈런을 때려내며 1995년 입단한 [[마해영]]과 총 33개의 홈런을 합작하여 1982년 김용철-김용희의 용용포에 이은 '''마림포'''[* 정확히 말하면 마임포라고 해야 맞다. 任씨는 두음법칙과는 관계 없이 '임'으로 발음한다.]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당시 롯데의 다른 포수들인 [[김선일(야구)|김선일]], [[강성우]]는 수비력은 정상급이지만 타격은 많이 아쉬웠으며, 특히 [[박정태]], [[김응국]], [[김민호(1961)|김민호]]로 대표되던 롯데의 중심타선이 단타위주의 선수들이었기에 그의 부드러운 장거리포는 무척이나 반가운 옵션이었다. 특히 1996년에는 이전해보다 타격에서 훨씬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으며, 113경기에 출장하며 3할 1푼 타율에 11홈런을 기록하여 롯데의 안방마님 자리를 공고히 차지했다. 표면상으로 10개 중반대의 홈런은 그리 크지 않아보이지만, 임수혁의 전성기인 95년과 96년은 투고타저가 매우 극심한 시기라 타자들의 기록이 전체적으로 잘 나오지 않던 시기였다. 1995년 홈런왕인 [[OB 베어스]]의 [[김상호(1965)|김상호]]의 홈런 갯수는 겨우 25개에 불과하며, 프로야구 원년부터 1995년까지 30홈런 이상을 친 홈런왕이 단 3회[* 1988 [[김성한]], 1991~1992 [[장종훈]]]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임수혁이 어느 정도의 거포였는지 알 수 있다. [[강민호]] 등장 이전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공격형 포수였던 셈. 이를 반영하듯 스탯티즈 기준 95년 임수혁의 wRC+는 122.0에 96년은 무려 143.2이고, 98년에도 기록이 좀 떨어졌다지만 380타석 가까이를 소화하며 9홈런에 wRC+ 97.1을 찍었다. 전성기 시절인 95년과 96년은 정말 중심타선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력이며, 98년의 성적도 포수임을 감안하면 준수한 공격력이다. 이렇게 안방마님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무릎 부상을 안고 출전해 온 탓에 1997년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부상의 여파로 1997년에는 49경기에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1996년 이후 단 한번도 타율 2할 6푼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롯데의 주전 포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클러치 히팅 능력 때문이다. 그는 큰 경기에 강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선수였다. 1995년 [[OB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10회초 희생플라이로 결승타점을 기록한 것이나,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9회 대타로 나와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려내는 등([[KBO 플레이오프/1999년/7차전|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참고)의 중요한 경기에서의 결정적인 활약으로 인해, 그는 롯데팬이 열광하는 선수가 되었다. 큰 경기에서 기대감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의 활약들을 보자. [[http://news.nate.com/view/20100208n05956|임수혁 최고의 순간 top1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