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모 (문단 편집) == 비판 == 한국의 대표적인 음악평론가라고 하지만 오류에 대한 비판도 잦다. 사실 이는 임진모가 국내 음악을 주로 비평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평론가 서병후[* 1942~2014. [[타이거 JK]]의 아버지이다.]가 스스로의 직업을 '''"[[팝 음악]] 칼럼니스트"'''라고 정의했듯 임진모가 주로 활동하던 8~90년대에 대중음악은 당연히 해외, 즉 영미권의 [[팝 음악]]을 칭하는 말이었다. 음악 좀 들었다 하는 사람들은 다들 외국, 그것도 선진국인 영미권의 음악에 빠삭하고 한국 대중음악은 질낮은 2류 음악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에 재평가의 바람이 불고 [[신중현]] 등의 원로 음악가들이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 임진모의 다음 세대라 볼 수 있는 [[신현준(대학교수)|신현준]] 등의 음악 평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본인도 이 재평가의 흐름에 동참하며 한국음악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임진모는 한국 대중음악평론가라기보다는 팝 칼럼니스트로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과거 문화 탄압이 심각하던 시절 전문가의 한계이기도 하다. 어지간한 해외 음반은 검열을 먹고 금지곡이 빠진 채 발매되거나 아예 한국에 발매되지도 않아 이른바 "빽판"을 구해야 했던 시절에는 구할 수 있는 정보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임진모와 같은 팝 칼럼니스트들은 질높은 정보를 독점한 채 전문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전문가조차도 사실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이 그렇게 좋지 않았으며, 정보를 얻는 루트도 미국 음악잡지의 가십성 뉴스나 그 가십을 번역한 일본 잡지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사실 이 전문가들이 말하던 지식들도 사실 완전히 틀렸거나 부정확한 것이 적지 않았다. 당장 한국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전문 DJ이자 [[시완레코드]]의 설립자인 성시완은 [[이탈리아]] 프록 밴드 프레미아타 포르네리아 마르코니(Premiata Forneria Marconi, P.F.M)의 이름의 유래가 뭔지 몰라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무선전신의 선구자 [[굴리엘모 마르코니]]를 기린 이름을 지닌 이탈리아 그룹”이라고 엉터리로 해석해 소개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실제 밴드 이름의 유래는 밴드의 고향 [[밀라노]] 근교에 있던 빵집에서 따온 이름이며, 이는 밴드 멤버들이 데뷔 당시부터 꾸준히 설명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정보마저도 전해지지 못할 정도로 당시 한국 음악 평론가들의 정보력이 열악했다는 것.] 나름 한국 아트 록 음악의 전문가이며 그 지식 수준이 임진모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성시완도 이러한 기본적인 정보를 몰라서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임진모가 퍼트린 정보 중 엉터리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도 이러한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다. 임진모는 어느 인터뷰에서 비틀즈 마니아들에게 미안한 점이 있다고 했다. 그동안 활동하면서 방송이나 글을 통해 비틀즈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정보를 소개한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았다. 그는 “비틀즈 팬들은 팝의 전설에 대해 모든 것을 꿰고 있지만 나는 음악평론가이기에 A부터 Z까지 다른 음악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다 챙겨야 되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죠”라며 사정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내게 비틀즈에 대해 가르쳐주면 고맙겠다, 메일로 지적을 받을 때가 가장 고맙다”라고 했다. 팬은 그 가수에 대해서만 애정 만세를 부르면 그만이지만, 평론가는 모든 가수들의 음악을 챙겨야 하기에 고충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이러한 구세대 방송인과 (자칭) 음악평론가들은 이후 문화 검열이 해제되고 [[인터넷]]이 등장하자 서서히 하나둘씩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이종환(방송인)|이종환]], [[김기덕(DJ)|김기덕]], [[김광한]] 등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영향력을 잃고 밀려났다.][* 대중음악평론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대중문화, 언론, 기업, 관료, 사회운동뿐 아니라 심지어 엄격한 학문적 검증을 요구하는 학계에서도 숱하게 벌어졌다. 이것은 구세대가 특별히 무능하거나, 사악해서가 아니라 국제교류가 거의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전문성을 쌓기 힘들었던 당시 시대의 한계로 봐야 한다. 그래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국제교류가 활성화되는 1990년대 이후로는 사회 전반에서 급격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핵심구호로 "세대교체"가 계속 등장했던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문제는 임진모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모는 [[배철수]]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십수년간 꾸준히 고정 출연했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방송 출연, 라디오 DJ, 신문 기고, 대중강연 등으로 어느새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평론가, 팝칼럼니스트로 자리잡아 버렸다. 거기에 [[김구라]] 등의 연예인들이 음악평론가의 대명사로 그를 언급하며 한국 음악평론가로서 임진모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연장시켰다. 이로 인해 '음악평론 하면 임진모'하는 공식이 대중사이에 생겨버렸고 나아가 이 임진모의 인맥으로 구성된 [[이즘|izm]] 사단이 등장하며 한국 음악평론계에 이른바 '임진모 [[카르텔]]'이 형성되게 되었다. [[뮤직메카]]라는 음악유튜버는 "언제까지 임진모일 것인가? 국내 음악평론의 현실에 대해 알아보자"라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는데, 언제까지 임진모만 찾을 것이냐라는 비판의 시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후배들 실력이 임진모와 비교 안될 정도로 자타공인의 인정을 받았었다면 진작 임진모는 끝났을 것 아닌가 하는 외부 시각도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