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모 (문단 편집) == 생애 == 1959년 8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중3 겨울방학 때 당시 명동에 있던 코스모스백화점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뒷골목을 기웃거리며 [[이소룡]]이 등장하는 스크린,로드쇼 등의 잡지를 구하다가 자연스레 팝송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가요는 그보다 훨씬 일찍 접했는데 [[배호]]의 노래는 음악평론가를 꿈꾸게 했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안개 낀 장충단 거리>, <누가 울어>, <두메산골>을 부르는 배호의 음색에 초등학생 때부터 취했었다고 하는데 6학년 때 배호가 죽고 KBS에서 1971년에 특집방송했던 것까지 기억할 정도라고 한다. 어쨌든 그가 처음 팝을 듣게 된 것은 1974년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존 레논]]의 <[[Imagine(노래)|Imagine]]>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해부터 월갑 팝송을 사서 읽으며 팝송에 대해 공부했다고 한다. 음악 외에도 이소룡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고교 입학 때까지 약 4개월을 쉬는 동안, 방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자 의도적으로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또, 고1 때에는 장래희망으로 음악 평론가를 썼다가 담임한테 혼났는데, 담임의 조언을 듣고 오히려 더 평론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 '''존 레논, 카펜터스, 신중현 등 팝이나 가요들이 라디오에서 나오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그러면서 평론가라는 직업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여의도고1학년 때 가정환경 조사를 했는데 저는 장래희망으로 음악평론가를 썼어요. 선생님한테 혼났죠(그건 자살골이다 라고 했다고). 당시에는 담임 선생님께서 ”네가 원하는 음악평론가로 현재 활동하는 사람이 누가 있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이백천 선생님이나 故 황문평 평론가가 있었지만 각각 PD와 작곡가라는 직업을 갖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일찍 꿈을 갖는 건 좋은데 좀 더 구체적인 꿈을 가져라’라고 조언해주셨죠. 지금도 그때 선생님의 충고 두 마디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음악을 하면 가난해져“와 ”음악은 가난을 예약한다(너 스스로 궁핍을 예약하는거다)“는 두 마디가 잊혀 지지가 않아요. 그렇지만 그때는 그 말이 와 닿지 않겠어요. 오히려 반대로 평론가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죠.''' 당시 임진모는 존 레넌, 폴 메카트니, 비틀스, 롤링스톤스, 로브, 카펜터스, 핑크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어니언스, 신중현, 이장희 등등의 음악을 들으며 이성을 잃게 만들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바꿔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세운 인생의 목표가 ‘음악평론’이며 대학 전공을 택할 때도 이 목표와 제일 가까운 것이 사회학이라 생각해 전공으로 택했다고 한다. 사회학과 다닐 때도 공부보다 귀퉁이에서 음악을 듣는데 열중했다고. > ''' 비로소 대학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음악 듣기를 시작해서 77년부터 14~15년 간 열심히 들었어요. 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해석해야 하는 입장이 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도깨비 골목(과거 외제 상품을 팔았던 시장 골목)에서 세 권의 원서를 구입했죠. 그 책은 저에게 전부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가 뻗어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제게 가장 중요한 뮤지션은 비틀스, 롤링스톤스, 국내에서는 신중현, 조용필, 산울림, 들국화, 서태지, 이렇게 나가는 것 같아요. 이런 음악들을 경험하면서 특히 80년대 말에 이르러 우리 대중음악장르가 굉장히 풍요로워지거든요. 그때를 살았던 게 제가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 임진모의 음악평론가 꿈은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했다. 임진모가 중학교 3학년 때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부터 하나둘씩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던 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가 도끼로 음반을 모조리 부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천 장 가량 되는 음반이 산산조각 났지만 다시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임진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지만 나를 음악평론가로 만들어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에요. 우리 아버지는 나로 하여금 fatigue를 없애줬어요. 사람이 진로를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장애물이 '피로'라는 것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물림증, 실증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음반을 부수지 않았더라면 저는 몇 년간 음악을 듣다가 그만뒀을 거에요. 분명히.''' 당시 임진모의 아버지는 유리 가게를 운영하였는데 대학시절,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음악이었다고. 모든 음악이 "야, 진모야. 괜찮으니까 당당하게 살아. 그렇게 살지마" 라고 자신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고. 임진모는 1984년 경향신문 27기 공채로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 내외경제신문로 이직해서 일하다 1991년에 퇴사했다. 약 6년 7개월여 간 재직하면서 머릿속엔 오직 음악 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한다. 비판과 독설을 싫어했던 터라 기자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하는데 음악평론가가 되고자 했던 이유는 비판과 독설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음악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라고. 거기다가,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한 이유 중 하나가 팝송에 대한 원서 자료를 구하기 힘들어서, 신문사에 취직해 신문사에서는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빌보드]], [[롤링스톤즈]], [[타임(주간지)|타임]], [[뉴스위크]]같은 다양한 민국 음악 관련 매체를 보기 위해서였다. > '''사실 기자생활을 원해서 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오로지 음악평론가를 원했죠. 기자생활 자체가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은 아니었다는 의미죠. 기사 작성법을 배우고 어떤 현안에 대한 관점을 갖는 과정을 배우긴 했지만, 저는 음악에 대해 쓰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죠. 신문사에 들어가서는 한 주간지에 팝송기사를 6년 동안이나 쓰게 되었는데요. 이때 외국 자료들을 보며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아요. 하지만 매주 팝송에 대한 칼럼을 쓸 수 있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1991년 5월에 사표를 던지고 황무지 같은 음악계에 나왔던 거죠.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에 제가 철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요즘 같았으면 그런 선택을 못했을 거에요.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내와 두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직업을 포기하고 음악평론가가 된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선택이었다고 봐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는 자아실현 행위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규정을 내렸죠.''' 막상 퇴사를 하고보니 당시에는 이미 팝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이 존재하였기에 바로 뛰어들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음악평론가로서의 경제적 삶이 불투명했기에 우선은 음반 제작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음반제작과 음악평론을 동시에 해내기로 했다. 하지만 경험부족과 의욕 과잉으로 음반이 모두 실패를 하며 쓴 맛을 보게 된다.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힘든 시절이었다고[* 발매한 음반 3개가 잇따라 실패하면서 1년 여만에 3억원 가까운 빚만 떠안았다고 한다.] 그러다 1993년,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가수)|인공위성]]이 1집 타이틀곡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로 대박을 치면서 빚을 모두 갚았다. 1집 앨범은 50만장 이상 팔렸다. 그는 인공위성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빚 때문에 계속 음반을 제작했을 지도 모른다고 자주 언급한다.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약간 있다. 임진모는 대학생 아카펠라 팀이었던 서울대학교 합창단 출신의 베거스 싱어즈를 소개받았다. 이들은 1991년 영국 6인조 아카펠라 그룹인 킹스 싱어즈(King’s Singers)가 내한공연을 해 큰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팀을 꾸렸다고 알려졌다. 임진모는 이들에게서 사업성을 봤고 결국 인공위성이란 이름으로 음반을 만들었다. 인공위성은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첫번째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전자음악이 유행하던 시기에 무반주 음악을 했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이들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인공위성은 아마추어였지만 순수한 목소리를 무기로 삼았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대로 1집이 대박을 친 것이다. [[인공위성(가수)|인공위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공위성(가수)|문서]]를 참조하자. > '''이때가 1992년 9월이었는데요. 이때부터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어요. 3개월 만에 탈고를 했지만 출판사에서 내주질 않는 거에요. 한 출판사에서는 계약금까지 주고도 8개월 동안 책을 내주지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동인기획 사무실로 대륙출판사 사장이 찾아와 원고를 보더니 곧바로 위약금을 물어주고 출판을 하게 됐어요. 갑자기 스케쥴이 폭발했죠. 인공위성과 제 스케쥴을 동시에 소화할 수 없어서 기획사 일을 그만뒀습니다. 바로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든 소중한 책이죠.''' 저서 <리얼리즘 팝아티스트>는 음악평론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는데 대형서점 이달의 책 코너에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와 동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조정선 PD가 이 책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섭외해 지금까지 연을 맺고 있으니.... 효자노릇을 제대로 한 책이다. ||[[파일:30대임진모.jpg|width=700]]|| 임진모의 첫 방송은 [[CBS FM|CBS 라디오]]에서 했던 김창환의 <꿈과 음악 사이>라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993년부터 [[MBC FM4U|MBC 라디오]]에서 방영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30년이 넘게 고정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2001년 8월 30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웹진 IZM(이즘)을 설립해 지금까지 21년 째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투자자가 6~7천만원 가량 대줬지만 2년 후 자력갱생하게 되었다고. 그때부터 매달 300에서 350 이상이 나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