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오위]](五衛) ==== 한편 농민군인 정군만으로 모든 국방을 감당하기 힘드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중앙군인 [[오위]]였다. 수도를 지키는 경군(한양에 주둔하던 군대) 대다수가 오위에 해당한다. 오위에는 시험을 통과한 직업군인인 [[갑사(역사)|갑사]], 별시위, 파적위 등과 농민군인 정병, 그리고 왕실 종친 및 공신의 자제들로 구성된 충의위, 충찬위, 족친위 등[* 종친이나 공신의 자제라는 출신 성분으로 파악할 수 있듯이 군사적으로는 큰 전력이 못 되었던 모양이다.] 이 모두 소속되어 있었다. 즉 오위군 전부가 숙련된 직업군인은 아니었다. [[갑사(역사)|갑사]][* 오위 중 의흥위에 소속]는 태종 1년부터 국가의 녹을 받는 상비군으로 편제되었다. 원래는 양반들이 주로 하던 직책으로 특히 기갑사(기병)는 서양의 기사들처럼 본인이 말을 준비해야 하니 부유한 자제가 아니면 하기 힘들었다. 일반 보병도 무장과 갑옷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맨앳암즈]]와 비슷해 서양에서는 맨앳암즈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대우도 좋아서 과전과 녹봉을 받았고, 만호(종4품의 무관)나 지방관으로 승진할 수도 있어서[* 실제로 [[유자광]]이 갑사 출신으로 병조판서 및 숭정대부의 자리까지 올랐다. 다만 유자광은 세조가 밀어준 덕이지만, 별시 문과 장원급제를 했기 때문에 이 성적을 바탕으로 출세한 것이다. 일반 갑사들은 [[경국대전]]에 의해 종4품까지가 승진한계였고, 금군은 정3품 당하관까지가 승진한계로 당상관 이상 출세하려면 역시 [[과거 제도|과거 급제자]]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갑사 중에 무과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이징옥]]이 갑사 재직중에 무과에 급제하고 종1품 숭정대부까지 승진한 경우였다. 물론, 조선사회에서 종4품이라도 상당히 출세한 것이니, 갑사가 결코 나쁜 대우를 받은건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는 경쟁이 심해 시험도 어려웠다. 어차피 이때는 양반도 군역을 져야 했는데, 갑사가 되면 일반 군역에서 빠지는 데다 봉록도 받고 잘하면 벼슬도 할 수 있으니 인기가 좋았다. (현대 단기하사처럼 어차피 가야할 군대면 월급이라도 받자! 정도) 하지만 군적수포제 실시 이후 어차피 양반은 군 면제 대상이 되어 군역을 질 필요가 없어지니 갑사도 기피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갑사가 되는 것은 일반 양인들이었고 대우와 지위도 조선 초기에 비해 나빠지게 되었다. 그래도 직업군인인 만큼 일반 농민병인 정병보다는 훨씬 정예병력이었다. 갑사의 규모는 편제상으로는 14800명이였고 중종 때 정원이 초과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이 때까지는 수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310112_001|#]] 하지만 명종~선조 시기에 갑사의 수가 감소하면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현대의 대통령 경호처에 상당하는 [[금군]](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금군은 편제상 오위와는 별개의 조직이나, 직업군인이라는 점에서 여기에 포함해 서술. 정확히는 오위 병사들 중에서 무예와 용모가 뛰어난 자들을 특별히 선발해 내금위와 겸사복으로 편성했다. 우림위는 오위 병사 중 [[서얼]]인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인재를 선발해 임명한 직책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서얼에 대한 보상적 취지도 있었다. 품계상 내금위나 겸사복보다는 아래였지만 일반 갑사보다는 위였다.]은 병력 약 7백여 명을 거느렸고, 그 밖에 국왕의 친위군이라 할 수 있는 별시위[* 초기에는 경제적인 여력이 되는 양반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나 후일 규모가 증대해 일반 양인들도 들어오게 된다. 오위 중 좌위인 용양위에 소속되었다. ]와 한량들을 모아 만든 특별 군사조직인 정로위[* [[중종(조선)|중종]]대에 창설되어 [[광해군]] 대에 폐지. 한량들이 [[금군]]으로 근무하려면 정로위 근무경험이 필수였다.]가 있었다. 이들은 취재를 통해 선발된 직업군인인 만큼 일반 농민병인 정군보다는 상당한 훈련도를 자랑했다. [[신립]]이 경군에서 기병 8천여 명을 경군 중 차출해서 [[탄금대 전투]]에 참전하였다는 기록을 보건데, 여타 경군 병력도 최소 8천여 명은 되어 보인다. 물론 8천 명의 자질과 숙련도는 별개지만 말을 탈 수 있었다는 점으로 이들 중 상당수가 직업군인인 기마갑사 및 별시위임을 추측할 수 있다. 후술하는 [[류성룡]]의 자료에 의하면 이들은 약 2만 3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