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일본군 병력 구성 === * '''제1군''' - 큐슈 서부 세력, 18,700명(선봉 겸 평안도 정벌군)[* 기록마다 병력 수가 차이가 난다. 16,700명이라는 기록도 있고 18,700명이란 기록도 있다. 추후에 징발된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 [[고니시 유키나가]](7,000명) * [[소 요시토시]](5,000명)[* 거제도랑 울릉도를 봉토로 받은 소 요시토시가 무리하게 병력을 이끌고 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인구가 적었던 쓰시마는 사람들 씨가 말랐다고 한다. 여기에 쓰시마 도미 중 조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56명, 쓰시마에 살던 조선인 5명을 통역으로 종군 시켰다. 현재도 쓰시마의 인구는 40,000 ~ 50,000명을 겨우 웃돈다. 소 대신 무네라고도 읽는다. 그래서 무네 요시토모라고도 한다.] * 마쓰라 시게노부(3,000명) * [[아리마 하루노부]](2,000명) * 고토 스미하루(700명) * 오오무라 요시아키(1천 명) * '''제2군''' - 큐슈 중부 세력, 22,800명(선봉 겸 함경도 정벌군) * [[가토 기요마사]](1만 명) [* 당시 고니시와 사이가 좋지않던(앙숙 수준이였다.) 가토를 2군으로 보냄으로써 서로 경쟁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나베시마 나오시게]](12,000명) * 사가라 요리후사(800명) * '''제3군''' - 큐슈 동부 세력, 11,000명(황해도 정벌군) * [[구로다 나가마사]](6,000명) * [[오토모 요시무네]](5,000명) * '''제4군''' - 큐슈 남부 세력, 17,000명(강원도 정벌군) * [[모리 카츠노부|모리 요시나리]](2,000명) * [[시마즈 요시히로]](10,000명) * 아키즈키 다네나가(1,000명) * 이토 스케타카(1,000명) * 다카하시 누로(1,000명) * 다카하시 모토타네 * 시마즈 다다토요 * '''제5군''' - 시코쿠 세력, 24,700명(충청도 정벌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5,000명) * 토다 카츠타카(4,000명) * [[쵸소카베 모토치카]](3,000명) * [[이코마 치카마사]](5,500명) * [[하치스카 이에마사]](7,200명) * '''제6군''' - 큐슈 북쪽 세력, 15,700명(전라도 정벌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0,000명) * 고바야카와 히데카네(1,500명) * [[타치바나 무네시게]](2,500명) * [[타치바나 나오츠구]](800명) * 쓰쿠시 히로카도(900명) * '''제7군''' - 주코쿠 서쪽 세력, 30,000명(경상도 정벌군)[* 일종의 후방 예비대, 보급대 성격이 강했다.] * [[모리 데루모토]] * [[모리 히데모토]] * '''제8군''' - 주코쿠 동쪽 세력, 10,000명[* 경기도에 진주한 명목상의 총사령관.] * [[우키타 히데이에]] * [[나카가와 히데마사]] * 우키타 타다이에 * '''제9군''' - 간사이 세력, 11,500명 * [[도요토미 히데카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로 원래 하시바 히데카쓰로 불렸으나 1586년부터 하시바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성씨를 쓰면서 이를 따라 도요토미 히데카쓰로 개명. [[거제도]]에서 병사했다.] * [[호소카와 타다오키]] * '''수군''' 9,450명 * [[구키 요시타카]](1,500명) * [[도도 다카토라]](2,000명) * [[와키자카 야스하루]](1,500명) * [[가토 요시아키]](1,000명) * [[구루시마 미치후사]](700명) * 구와야마 마사하루(1,000명) * 도쿠이 미치토시(700명) * 스가이 에몬쇼(250명) * 호리우치 요지요사(850명) * 스기와카 덴사부로(650명) {{{+1 이상 합계 170,850명}}} * '''부교'''(奉行) '''• 군감'''(軍監)[* 히데요시에 의해 군 전체를 감독하고 비상시에 의견을 조율, 보고하는 직을 맡음.] * [[이시다 미츠나리]]: 부교로 끝나지 않고 [[행주대첩]]에도 참전했지만, 본인의 처참한 군재만 입증하고 참패했다.[* 미츠나리의 졸전은 이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이어진다.] * [[오타니 요시츠구]] * [[마시타 나가모리]] * 가토 미츠야스 * 마에노 나가야스 * '''기타 참전 인원''' * [[구로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명으로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귀국했다. * [[아사노 요시나가]] * 미야베 나가후사 * 난조 모토키요 * 이나바 사다미치 * [[가메이 고레노리]] * [[다테 마사무네]] * [[안코쿠지 에케이]] * 키노시타 시게카타 * 사이무라 마사히로 * 아카시 노리자네 * 벳쇼 요시하루 * 가키야 츠네후사 * 후속 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 있었다. *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역 등 8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 ~ 9군의 지역을 보면 주로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이 참전했다. 동부 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 ~ 16군 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예비대 총 병력: (117,860명) * 10번대 17,550명: 난쵸 모토키요, 미야베 나가히로, 기노시타 시게카타, 가키야 츠네후사, 마에노 나가야스,사이무라 히로히데, 아카시 노리자네, 벳쇼 요시하루, 나가오카 다다오키, 기노시타 가츠토시, 기노시타 도시후사, 기노시타 노시토부, 나카가와 히데마사 * 11번대 24,960명: [[아사노 나가요시]], [[오타니 요시츠구]], 기무라 시게코레, 오오다 카즈노리, 야마다 도사부로, 하세가와 히데카즈,오야마 타다모토, 아오키 가즈노리, 호리 히데하루, 호리 치카요시, 미조 * 12번대 10,000명: [[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나가 * 13번대 6,450명: [[오카모토 시게마사]], 히토츠야나기 가유, 하토리 가즈타다, 미즈노 다다시게, 오다 노부카네, 마키무라 세이겐 * 14번대 13,750: [[하시바 히데카츠]], 이토 모리카게, 이바나 사다미치, 모리 다다마사, 카네모리 가시게, 사토 가타마사 * 15번대 4,100명: 히데노 다카아키, 모리 히데, [[이시카와 카즈마사]], [[센고쿠 히데히사]], [[가토 미츠야스]] * 16번대 12,050명: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 우츠노미야 구니즈나, 나스 슈우, [[사타케 요시노부]], [[사토미 요시야스]], [[사나다 마사유키]], [[우에스기 카게카츠]], [[모가미 요시아키]], 사노 료하쿠, 난부 도시나오 * 특수부대: 29,000명 예비대(6,400명), [[오다 노부카츠]] (2,200명), 조총수(1,800명),기마무사(12,000명), 후방부대(7,600명) '''{{{+1 최종 동원 병력 288,710명 + @}}}''' '''{{{+1 동원 선박 2,100여 척 이상}}}'''[* [[펠리페 2세]]에게 카락과 갤리온 구입 의사를 보낸 적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 측 기록에 나오는 일본 군선의 총합은 2,787척이나 중복집계가 많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100여 척의 선단에, 1586년부터 시작된 건조 계획으로 2,000척이 건조되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일단 2,100척을 초과했던 것은 분명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3,000여 척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이것은 당대 지구상 전체를 통틀어 견줄 군대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군대였다. 당시 지구상에 28만이라는 대군을 실전에 투입 가능한 국가는 명나라와 무굴 제국 외에 없었다. 16세기 지중해 세계 최강이었던 오스만 튀르크가 전병력을 동원해도 15만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군 대부분은 당대 비교할 상대를 찾기 힘든 뛰어난 직업군인 [[아시가루]]가 절대다수였으며, 전체 병력의 20% 가까이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정확한 비율은 학자마다 차이가 난다. 그리고 조선에 투입된 병력의 20% 정도가 조총으로 무장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전체 병력의 10% 정도만 조총병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당대 비교할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높은 보급률이었다. 이후로도 플린트락과 머스킷 등의 더 우수한 총이 등장하기 전에 히데요시 정권기의 일본보다 높은 수준의 매치락 무장률을 보인 국가는 [[조선|지구상에 딱 하나]]밖에 없다.]. 과장 없이 당시 히데요시가 동원한 일본군은 '''세계 최강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