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 이런 상황임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 같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시|상주]]에서 고니시에 의해 패배하였고 이일은 갑옷은 물론 융복까지 벗어 던지고 완전히 [[나체]]로 도망쳤으며,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신립이 이끌었던 경군(京軍) 기병대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 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 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 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탄금대 vs 조령 논쟁은 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활발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탄금대 자체가 육계도 사주 지형이라 말을 달리기에는 장애물이 많은 곳이었던데다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군은 이 충격력이 급전직하한 궁기병을 제압하고 남한강변에 몰린 조선군 주력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록마다 [[오오타치|큰 칼]]과 조총 사이에서 어느쪽이 주력이었는지는 다르다. 다만 기존의 수적 주력이었던 장창은 회전에서는 기병이 주력이고 보병은 농성 위주로 싸운 조선군을 상대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 수정 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경군 기병 8천여 명, 혹은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천 명을 합하며 1만 6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부대가 오합지졸이었다는 설은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프로이스 신부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 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차례 - 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http://lyuen.egloos.com/4952497|#]] 전쟁 발발 초기 조선군이 부산진-탄금대에 이르기까지 투입한 병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탄금대 전투]]의 전력 규모를 보면 일본 1~3군의 절반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정도면 방자(防自)의 이점을 살려 적을 완전히 격퇴시키지는 못해도 지연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너무 쉽게 대패했으며,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수급 3천 개를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한양과 일본군 사이를 가로막는 야전군은 사라졌고(설령 신립이 조령을 틀어막았어도 일본군은 3로로 진격하는 중이었다.) 방법이 없어진 선조는 수도인 한성부에서의 방어 대신에 북쪽으로의 피난을 선택하였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한양 농성이란 선택지는 불가능했다. 신립이 이끈 경군이 탄금대에서 섬멸되면서 한양을 지킬 만한 병력부터가 사실상 없었고, 그 전에 [[한양도성]] 자체가 방어에는 매우 불리했다. 특히 당대 한양도성은 조선후기와 달리 성곽에 치성이나 곡성 등이 전무한 상황이었으며, 성이 너무 넓고 교통로의 대부분이 평지에 접한 형태라서 대군으로 공성전을 펼치면 쉽게 뚫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한양도성|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한강 전투]]의 패배후 개전 20일 만인 5월 3일 한양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하였으나 이미 선조가 파천을 떠나서[* [[컬쳐쇼크|일본으로서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의 전쟁에서 영주가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그 영지에 대한 권한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한편 끝까지 저항하거나 자결한 경우는 그 영주의 친척들이 영지에 대한 권한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든 세력을 모아 영지를 점령한 영주에게 맞서는 것은 정당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당시 조선에서도 이런 인식은 비슷했다. 차이점은 왕의 영지가 일본과 달리 조선 전 국토였다는 점. 그래서 후에 선조가 [[의주부|의주목]]에서 요동으로 넘어갈려고 했을때는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다.]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은 실패한다. 그리고 최단 시간 한양 점령만을 목표로 하면서 제껴두었던 다른 지역들을 기반으로 관군과 의병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경부가도에서 비껴나 초기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조선 최대의 곡창 지대 호남이 아래 서술하는 반격의 근거지가 된다. 또한 임진왜란이 시작된지 1년이 지나자 일본군 20만명 중 동원이 가능한 병력이 7만 안팎이었는데 이는 점령지 관리로 빠진 병력도 있지만 대부분이 전사, 부상, 탈영 등에 의한 것으로, 일본군도 초기에 많은 승리를 했지만 그만큼 손실을 보았다는 뜻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