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일본군의 퇴각 이유 ====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막부]] 체계로,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연합국가 성격이 강했다. 그것이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거치며 그 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 무력으로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기타 [[다이묘]]들은 사병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군의 경우, 경기도 수원부(水原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이라고 한다면, 권율이 이끈 군사 4천 명은 '''조선군'''이지 권율의 사병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군의 경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 7,000명이라고 하면, 고니시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고니시군'''이다. 왜장들은 피로 피를 씻고, 자식이 아비를 축출하거나 죽이고[* [[다케다 신겐]], [[사이토 도산]]의 아들 [[사이토 요시타츠]]가 유명하다.], 가신이 주군을 죽여 다이묘가 되던 [[센고쿠 시대]]의 인물들이었던 만큼 철저히 출세 지향적이었고, 의심이 많았다. 조선으로 출병을 결정한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바치려 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땅을 넓혀 더 크게 성장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병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실제로는 일부분일 뿐 장수들 대다수는 조선땅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장수들은 다 자기 영지 가진 다이묘였으니 당연한 것.]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한가닥 하던 다이묘들은 언제든지 도요토미의 뒤통수를 칠 기회도 노리고 있었다. 한편, 규슈 정벌을 끝으로 일본 전역을 통일한 만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신들에게 더 줄 것이 없었다. 일본 자체가 영주들이 우글거리는 봉건 국가였기에, 전공에 대한 보상은 '[[고쿠다카]]' 즉, '''토지''' 였고, 토지여야만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해 [[숙청]]과 [[카이에키|개역]]을 벌여 논공행상을 정리하였고[* 운 좋게도 도요토미 세력과 대규모 내전을 두 차례나 벌여 승리한 덕택에 쫓아내야 할 다이묘가 산처럼 쌓여 있어서 줄줄이 개역을 시키고 토지를 빼앗아 지지세력들에게 나눠줬다. 물론 그렇다고 쫓겨난 다이묘들을 죽으라고 한 건 아니고 정말 가문 자체가 무가에서 사라진 사례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 극소수이며, 심지어 [[이시다 미츠나리]]도 본인만 참수했지 그 가족들의 신분은 박탈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전봉처분을 내려서 다른 데로 보내는 걸로 끝내거나 하타모토로 임명해서 최소한 먹고살 길은 마련해 줬다.], 히데요시도 전봉 조치[* 공을 세운 사람의 석고를 높여주긴 하는데, 새로 복속된 봉토를 주는 것이다. 새로 복속된 봉토의 백성들은 당연히 기존 다이묘를 선호하지 이후 전봉되어 온 다이묘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잇키(농민반란)' 등이 일어나기 일쑤고, 이걸 핑계로 '학정을 한다. 땅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구실을 잡아 숙청하는 것이다. 이에야스도 이것에 당해 기존 세력권(미카와, 도토미, 스루가)에서 새로 복속된 구 호조 지배 지역([[간토]])으로 전봉되었다. 명목상 고쿠다카가 100만 석 이상 늘어난 수준의 엄청난 영전이었으나, [[후호조씨]]의 지배를 오래 받던 간토는 문제의 여지가 엄청나게 많은 영지였으며, 히데요시는 이걸 이용해 이에야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숙청한 심보로 전봉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특유의 정치력을 보여 간토를 안정시켰고, 오히려 간토 전봉과 그로 발생한 손실과 위험성을 구실로 심아 임진왜란 출병을 미뤄버린다.]나 개역을 하지 않은 건 아니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휘하 가신과 다이묘의 불만을 누를 겸, 본인의 과대망상도 실현하고자 명나라와 조선이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해 침공한 것이다. 여기서도 도요토미 정권의 한계가 드러나는데, 히데요시 최대 정적인데다 세력도 가장 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물론[* 히데요시 입장에서 이에야스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상대였는데, 이에야스를 모략으로 이겼을 뿐 힘싸움으로는 이기지 못했다([[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거기에 히데요시 본인이 한 이에야스의 간토 전봉 조치 때문에 이에야스의 세력이 엄청나게 커졌다.], 일부 다이묘들은 끝까지 이런저런 핑계로 출전을 미루며 가문의 병사들을 최대한 보전시켰다. 80만석 이상의 대영주이자 히데요시에게 충심이 깊었던 [[마에다 토시이에]]는 참전하지 않았고, 모리(+코바야카와), 시마즈[* 규슈 정벌 직후라 가문이 쪼그라들어 땅을 더 얻을 필요가 있었고, 히데요시에게 잘 보일 필요도 있었다.]를 제외한 기타 대영주들도 참전하지 않거나, 참전해도 조선땅 찍고 다시 돌아갔다. 조선 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 선봉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모리, 코바야카와, 쵸소카베, 시마즈 등 센고쿠 시대에서도 이름난 대가문을 출동시켰는데, 거기에다가 딱히 전공도 없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앉혀놨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키타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사실상 무시당했고, 오죽하면 그나마 총지휘를 했다는 [[행주대첩]]조차 본인은 얼굴마담이고 실제 지휘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전투가 아니면 협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침략의 선봉이던 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 실제 가토는 고니시의 집안이 과거 약장사 일을 했다는 이유로 고니시를 가리켜 걸핏하면 [[약장수]]라고 놀려댔고, 분노한 고니시가 칼을 뽑아들고 가토를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조선 조정에서도 이들의 반목을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침공 루트도 아예 동서로 전혀 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엔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고니시에게 1군을, 가토에게 2군을 맡긴 것 자체가 둘의 안 좋은 사이를 이용해 선봉 경쟁을 하게 만들어 잘 싸우게 하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둘의 협조가 안 된 덕택에 고니시는 행주대첩을 제외하면 조선과 명의 협공을 거의 혼자서 감당해내야 했다. 그러고도 행주대첩 직후 기준으로 3분의 1의 병력을 보전하여 퇴각한 게 대단한 거지만 역으로 보면 그만큼 일본군의 각 부대간 협조가 안 됐다는 뜻이다.] 이런 와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출병해있던 다이묘와 병사들은 얼마 안가 일본 내에서 영주들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승산 없는 전장인 조선에서 시간 질질 끌고 있어봐야 이미 무의미한 상황이었기에 황급히 철군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자신에게 충성스럽고 능력 있던 고니시는 이 전쟁에서 군대를 거의 다 잃어 이후 도쿠가와파와의 싸움에서 제대로 기여하지 못한 채 본인은 참수당하고 가문은 멸족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자기 살만 과하게 깎아먹은 탓에 이후 정적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