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조선의 보복 논의 === 1598년 12월 노량해전으로 왜란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군이 아직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당시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상소로 '''[[대마주|대마도]]에 대한 보복전'''을 건의했다. 왜란 중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황신은 대마도가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구원하기 어려운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명군과의 연합작전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1591년 조헌의 지부상소 때와 달리, 다년간의 왜란으로 시달려서 일본에 이를 갈고 있던 [[선조(조선)|선조]]는 이번엔 이 상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비변사에 진지하게 논의하게끔 한다. 특히 당시 선조가 하루 안에 이 안을 논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공격전에 상당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변사는 왜란으로 인해 조선군이 손실이 커서 병력이 부족하고, 황신의 견해와 달리 대마도는 일본 본토에서의 구원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이에 우의정 [[이덕형]]은 명군과 상의했는데, 명군도 대마도를 점령한 후에 지켜내야 하는 문제가 있고, 황신이 봤을 때와 달리 전황이 달라져서 대마도에 방어 병력을 두었을거라며 역시 난색을 표하고, 점령 후 수성이 아닌 단순 응징차원의 공격이라면, 선 정탐 후 움직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실록의 기록상,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기사가 없기에 그 사이에 진행되던 명군의 철군이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중앙 조정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움직임은 없었다. 항왜 소운대를 일본에 첩자로 보낸다거나, 정벌 목적의 정탐 움직임은 있었던 정도였다. 다만 지방 차원에서는 이 작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이후 1599년 4월에 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김경립 등 10인을 시켜 일본 내에서 배를 탈취하는 등의 작은 전과를 기록하며, 정탐한 결과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특히 대마도에서 조명연합군의 응징 공격이 두려워 겁을 먹고 성을 쌓고 밤낮을 쉬지 못한다고 했다는 보고 내용으로 보면[* 대마도는 일본과의 무역이 금지된 뒤에도 조선과의 교역을 유지했으며, 조선에서 식량을 사들여야만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식량 공급이 끊겼기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도 속출했을 지경이었으며, 물론 당시 일본도 조선에 끌려갔다가 죽은 사람이 엄청나서 사회에 미친 악영향이 상당했던데다 도요토미 사후 다시 혼란기였던지라 여기저기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그 참상은 대마도가 특히 심각했다. 결과적으로 소 요시토시 입장에서 보면 도요토미와 그의 가신인 고니시 때문에 자기 영민들이 비참하게 된 꼴인데,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이후 장인 고니시를 배신한 것이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런 점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 측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보복 공격에 대한 방어 의도가 확실히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김응서는 이 치계(보고서)에서 명군에 통보해서 같이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마무리지었으나, 실록에서는 이 치계에 대해서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김응서 부대의 작은 전과는 민간에도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소설 [[임진록]]에서는 일본을 응징한다는 가상 이야기에서 김응서가 꽤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