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일본의 상황 === || [[파일:히데요시.jpg|width=100%]] || [[파일:external/castles.chicappa.jp/sokentenshu-sw-full3(600).jpg|width=100%]] ||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사카 성]][* 지금의 오사카 성의 천수각은 [[오사카 전투]](오사카 여름의 진) 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도쿠가와 막부]]가 재건한 것이 여러 이유로 또 다시 소실되었다가, [[20세기]]에 도요토미 시대와 도쿠가와 시기의 모습을 섞어 개건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오사카 성]] 천수각과는 다르다.] ||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파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 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 진출'이라는 이름의 침략 야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노부나가의 유력 가신인 히데요시가 충분히 영향을 받을 만 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섬|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 소 가문은 [[메이지 유신]] 후 [[화족]] 중 [[백작]] 작위를 받는다. [[덕혜옹주]]의 배우자였던 [[소 다케유키]] 백작의 가문이기도 하다.]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조선 통신사|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에 일본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 이 [[타치바나 야스히로]]는 실록이나 조선 측 기록에서 귤강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시 반백이 넘은 나이로 사신을 빙자해 조선에 많은 어그로를 끈 인물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지리를 정탐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유명한 예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라고 비웃었다거나, 연회 도중 소매에서 [[후추]]를 던지자 악공과 기생, 노비들이 앞다투어 정신없이 후추를 줍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너희들 기강이 엄청 해이하니 국운이 망할 징조.'라고 깔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덕분에 이 이야기들은 전쟁 이전에 조선이 평화에 젖어 있었으며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고 까는 근거로 잘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만하던 야스히로는 조선 교섭 임무를 실패해 귀국 직후 히데요시의 화를 사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이렇게 도요토미의 첫 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조선에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이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 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한 그는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쓰시마 도주로서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하면서 바닷길이 험하다면 자신들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과 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군]]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보내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쓰시마는 이를 확답으로 만들기 위해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하는 노력을 보였고,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과 [[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 이 사람의 고조부가 그 유명한 [[황희(조선)|황희]]다. 황희의 장남 황치신의 증손이다.], 부사 [[김성일(조선)|김성일]], 서장관 허성[*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형이다.]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은 당시 당파로 서인이지만, 김성일과 허성은 동인으로 같은 당파였다.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는 것이 비록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비롯되었지만, 송강 [[정철]]이 세자건저문제로 실각하면서 그에 대한 처벌 강도를 두고 나눠진 것이며, 보다 본격적으로 분화되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시에 재상으로 활동한 [[서애 류성룡]]에 대한 비난을 [[남명 조식]] 학파가 하면서 본격화 된 것이였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류성룡]]과는 사제지간이기에 이후 [[남인]]으로 분류되며, [[허균]]의 형인 [[허성]]은 퇴계의 학파<嶺南(左道)學派>가 아니고, 동인 내에서 두루 교류한 아버지와 북인(특히 대북)에 속하는 동생의 영향으로 [[북인]]으로 파악하는 듯하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동산도[* 간토 및 도호쿠 지역.] 원정으로 출정하여[* 이 때가 바로 [[후호조씨|호조 가문]]을 정벌하던 시기였다.]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온 뒤에도 궁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국서를 받지 않았다. 결국 11월 7일에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는데, 그리고 이 회견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인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효게모노]]에서 묘사된 장면 [[https://youtu.be/Lo9Y499kJgA|##]] 저 오줌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실록과 [[징비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세 번째 기사[* 원문 출처는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3001_003|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도요토미 츠루마츠|츠루마츠]]와 오줌 문제에 비하면 소소한 면이지만 다른 접대 문제도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처럼, 당시 회담장에서의 접대 및 상차림은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식생활 또한 소박함을 지향했다지만, 당시 문헌을 보면 문화적 상대성을 고려하더라도 외국의 사신에게 대접하는 상차림과 예법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효게모노에서 [[도자기]]란 소재로 각색한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거기에 뒤늦게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조선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호칭)|전하]](殿下)가 아닌 [[합하]](閤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이런 것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의 답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 합하(閤下)는 전하보다 낮은 경칭으로 재상급 인사에게 붙이는 것이다. 이런 경칭들은 기본적으로 본인보다 격이 낮거나, 아랫사람에게 붙이는 경우는 없으나, 경칭의 격을 낮추면서, 조선 국왕을 은근히 모욕한 것이라고 볼수도 있다.]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 >우리 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년 ~ 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 >사람의 한평생이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 >천정(天正) 18년[* 1590년. 당시 일본의 [[연호/일본|연호]]]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함 >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네 번째 기사[* 원문 출처는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3001_004|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이에 대해 통신사인 [[김성일(조선)|김성일]]은 답서의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다고 여겨, ‘만일 이 글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이 있을 뿐, 가져갈 수는 없다.’고 따졌더니 [[게이테츠 겐소|현소]]가 서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글을 짓는 자가 말을 잘못 만든 것이라 핑계를 댔다. 그러나 전하와 예폐 등의 글자만 고쳤을 뿐, 기타 거만하고 협박하는 식의 말에 대해서는 ‘이는 대명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이라고 핑계대면서 고치지 않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요제이 칙서.png|width=100%]]}}}|| 당시 천황이던 [[고요제이 덴노]]는 개전 초기에 조선으로 직접 건너가려고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행을 만류하는 서신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히데요시의 조선행은 연기되었다 하고, 실제로 조선행은 최종적으로 성사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