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기타 == * 조선과 현대의 한국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이 언급된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이 전투들을 잘 모른다. [[목사(관직)|모쿠소 호간]] 때문에 진주성 전투가 좀 유명한 정도. 행주 산성 전투는 조선 내 일본군 주요 다이묘들이 초호화 드림팀을 구성해서 10: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대패한 전투이지만 역시 잘 모른다. 17세기 경에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될 때 까지, 일본인들은 행주 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긴 것이 명군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정벌기> 같은 당시 일본책에서는 이 전투를 안남성 전투라고 부르며,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병사들이 산위에서 내려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 내 주요 장수들이 다 출전한 진주성 전투, 행주 산성 전투와는 달리 한산도 해전은 일본에서 완전 듣보잡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C급 장수들만 출전한 전투라[* 오히려 전투는 물론이고 장수이름까지도 한국인이 더 잘 알 정도.] 중요도에 비해 일본 측에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 반대로 일본 측에서 3대 대첩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벽제관 전투]] (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전투]] (1597년 ~ 1598년),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전투]] (1598년) 이다. * 벽제관 전투는 명군이 기세 좋게 지원 왔다가 벽제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여 평양까지 도망간 전투로 역사책에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또한 명나라가 더이상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일본 측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한국에서는 완벽한 듣보잡. 역사 매니아 아니면 도저히 모를만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대공세인 [[사로병진책]]의 일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조명 연합군이 4방향으로 병진하여 육상 방향 3군데에서 패했는데 일본은 이를 임진왜란 최대의 대첩으로 보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는 남은 한 방향인 바다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조명 연합 수군의 전투 [[노량 해전]]만 중요한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서로 이긴 전투만 기억하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노량 해전을 이긴 전투로 계산하고 있다.[*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 시점에서의 노량 해전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되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피로스의 승리]]로도 볼 수 있다. 다만 노량 해전 당시 일본군이 일본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의 정도가 피로스의 승리라고 보기에도 너무나도 컸음을 감안하면 그냥 일본의 정신승리에 가깝다.] * 조선 3대 패전을 [[쌍령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으로 보고 있고 그 중 두개가 임진왜란 때이지만, 웬일인지 일본은 그 두 전투를 빼놓고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를 3대 대첩으로 분류하고 있다. 용인 전투야 역덕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다이묘가 기병 수십 명으로 공격하자, 밥먹고 있던 조선군 5만 명이 모랄빵 났던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전투인데, 일본 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라이벌로 설정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보고 "아! 이렇게 훌륭한 장수를 왜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었지?"하는 일본 측 반응이 나올 정도. 칠천량 해전은 조선 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고 '칠천량의 무너짐'이라고 표현했던 사건인데 조선 수군 134척 ~ 180척을 상대로 일본군 2척이 접근하자, 겁먹은 총지휘관인 [[원균]]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고, 이를 본 다른 수군들이 모랄빵 나서 저절로 무너졌던 전투였다.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도도 다카도라]]의 50척은 이 때야 뒤늦게 참전함. 모랄빵 나서 도망간 덕분에 조선군이 거의 죽지 않은 전투이기도 한데, 남해안 곳곳에 숨어있다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자 판옥선까지 끌고 다 나타난다. 일본 측에서는 3대 대첩 중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 싱거웠던 듯. * 조선의 가장 크게 패배였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 3개를 일본이 3대 대첩이라고 한 것은 3대 대첩의 지휘관이 일본 내에서 유명한 장수라는 점과, '''조선과 일본의 전투가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군 간의 전투'''이기 때문이다. 벽제관 전투는 평양성에서 명군에게 패배하여 몰리다가 한방에 뒤집은 중요한 전투였고,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의 경우 명군이 패배하기는 했지만 일본군도 처절하게 싸운 전투이다. * 조선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는 [[이치 전투]], [[평양성 전투]], [[벽제관 전투]]를 꼽기도 한다.[* 일본 쪽 연구로는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는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숫적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 그 외에도 한국사 최악의 3대 패전으로 꼽히는 [[원균]]의 [[칠천량 해전]]도 임진왜란에서 벌어졌다.] * 명나라에서는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벽제관 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치기도 한다. * 여태까지 한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철저하게 잊혀진 부분이지만, 조선과 일본은 1593년 8월 이후부터 1597년 8월 27일까지 휴전 상태에 있었으며, 이 기간 동안 조선은 일본군 못지않게 위협적인 적들과 싸웠는데, 그들은 바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도적]]들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1594년 12월 1일 기사를 보면 [[전라도]]와 [[경상도]]와 [[경기도]]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는데, 광주와 이천 및 [[지리산]]으로부터 남원의 회문산과 장성 노령 등 수십 개 군(郡)의 산골이 모두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한다. 도적들을 이끈 두목들의 이름은 각기 김희(金希), 강대수(姜大水), 고파(高波), 현몽(玄夢), 이능(李能)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제각기 활동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도적질을 함께 했으며, 그로 인해 관군이 처음에는 토벌에 실패하였다가, 도적 괴수들을 죽이면 [[현상금]]을 준다고 내부 분열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이능은 자기 패거리한테 죽임을 당하고, 가장 사나운 도적이었던 현몽의 패거리는 관군에게 항복하거나 도망쳤고 현몽 본인도 도망쳐 사라졌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양주에는 이능수(李能水 이능?)가 있었고, 이천에는 현몽(玄夢)이 있었으며, 대략 '''1594년 여름부터 이 도적떼들이 조선 각지를 휩쓸었는데, 그 규모가 적게는 1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도적질을 일삼았는데, 그들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관아에서도 막지 못했다. 이 도적들 중에서 남원의 김희(金希)와 영남의 임걸년(林傑年)이 가장 세력이 강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장수인 전라 병사 [[김응서]](金應瑞)와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 등을 동원하였다. 1594년 8월에 [[정기룡]]이 이복(李福)이라는 도적의 목을 베자, 그 무리들이 김희에게로 몰려갔다. 김희와는 다르게 남원에서 활동하던 도적인 고파(高波)는 그 무리를 거느리고 몰래 이교점(梨橋店)에 왔는데, 주민의 고발을 받고 출동한 판관 김류(金瑠)가 4백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교점을 덮쳤으나, 고파 일당은 전혀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밥을 지어 먹고 활을 힘껏 당기어 갑자기 관군에게 쏘아대니 관군이 무너져 달아났고 김류도 물러났다. 고파 일당은 김류가 돌아가는 길에 먼저 가서 매복하였다가 김류가 오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갑자기 활을 쏘아서 김류의 말안장을 맞혔고, 김류는 간신히 성중으로 말을 달려 도망쳤다. 결국 해가 바뀐 1595년 봄에 경상도의 관군이 김희와 강대수를 토벌하여 죽였고, 고파는 장성의 주민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마침내 조선의 도적들은 평정되었다.[* 출처: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43~145쪽] *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로 들어온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본국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굶주린 조선 백성들이 일본군한테 가서 식량을 달라고 구걸을 했으나 일본군 병사들이 모조리 베어 죽이는 바람에 테루모토 자신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https://blog.naver.com/halmi/221025942896|#]] * 여러모로 수백년 후 벌어진 [[한국전쟁]]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모두 1대 1이 아닌 제 3국이 개입한 국제전이었고, 선조와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 지도부가 피난을 갔으며, 전쟁 중간에 휴전을 한 것도 같다. 최악의 경우 선조는 명나라에, 이승만은 제주도나 일본, 미국에 망명정부를 고려한 점까지 같다. 전쟁 후 조선은 명나라에, 한국은 미국에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어 이후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군과의 싸움에 참전하게 되고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는 점도 같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모두 전쟁의 승부를 뒤집는데 해군(수군)이 지대한 기여를 했다(이순신, 인천상륙작전). 차이점이라면 선조는 개성 평양 의주로 북쪽을 향해 피난갔지만 이승만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남쪽으로 피난갔다는 점, 임진왜란은 끝내 일본군을 몰아냈지만,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정전으로 끝난 것이 다르다. * 이 시기에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배를 타고 한반도에 건너왔는데, 이들이 이용한 배에 [[창가학회|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써있는 깃발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각 왜군 장수들은 스스로를 상징하는 깃발(軍旗)을 달았는데, [[일련종]](日蓮宗)의 일파인 '미노부파' 신도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자신의 군기에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써넣었던 것. 가토 기요마사의 그런 행동은 전쟁에 나가는 장수로서 무사귀환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듯하다. 또 [[법화경|묘법연화경]]은 조선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불교 경전 중 하나였다. * 2017년 6월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의 [[대학수학능력시험/한국사 영역|한국사 영역]] 4번 문제는 임진왜란 문제였다.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3점] [ (가) ]의 전개 과정 - 모둠별 탐구 주제 모둠 1: 수군의 활약 - 이순신의 활약, 남해 재해권 장악 모둠 2: 의병의 활동 - 곽재우, 조헌, 고경명 부대의 활약 모둠 3: 명의 참전 - 조∙명 연합군의 왜군 격퇴 ① 임진왜란 ② 병자호란 ③ 만주 사변 ④ 청∙일 전쟁 ⑤ 러∙일 전쟁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