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창용 (문단 편집) == 평가 == >'''"나는 밖에 나오면 보잘것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사회생활은 잘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야구장에 있는 동안은 프로선수로서 부끄럽지 않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 >-임창용 선수의 본인 평가 [[http://www.apsk.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27|#]] 한국에서 [[구대성]]과 함께 유이하게 '''불패'''라는 수식어를 가진 투수이며, NPB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렸고, 40대 초반이 될 때까지 강속구를 뿌리며 프로에서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한국 야구계의 역대급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사생활 논란과 여러 구설수로 인하여 크게 저평가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은 업적과 기록이 매우 높아 대체로 한국 야구를 통틀어 최고의 사이드암 투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96년~1999년까지 100이닝+를 소화해왔고, [[마무리 투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97년 이래 세이브 순위에 늘 꾸준히 들어왔다. [[오승환]] 등장 전까지 KBO 최연소로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으며, 1998년에는 1점대 ERA도 찍었고[* 정작 평균자책점 순위는 2위였다.] 1999년에는 풀타임 마무리로 ERA 1위를 찍지 않나, 주전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향하더니 1선발로 등극하는 등... 아무튼 대단하고 놀라운 기록들을 많이 세우기도 했거니와, 일본 시절 전까지 전성기 대부분이 혹사로 점철됐고 [[토미 존 서저리]]도 받았지만 선수생활 후반부에 가서도 그 구속을 유지했다는 건 놀라움을 넘어 무섭기 그지없다. 의외로 마무리뿐만 아니라 [[선발 투수]]로의 능력도 대단한 투수다. 전성기 적이었던 2001년~2003년 잠깐 고정선발로 뛰었던 당시 삼성의 토종 1선발 자리를 꿰찼다는 것과, 선발 로테이션제가 확립된 2000년대 야구에서 달성하기 어려워진 200이닝+를 달성했다는 것, 선수 생활 말년에 선발로 떠밀렸는데도 버텨서 일정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선발 투수로서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커리어 대부분을 마무리 대신 고정선발로 뛰었어도 300세이브에 필적하는 대기록을 수립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의 투수. 어쩌면 고정선발은 혹사가 덜한 편이니 커리어 대부분이 고정선발이었다면 마무리 300세이브 이상의 대기록을 세웠을 수도 있다. 우완 역대 최다승이라든가... 선수 초중기 엄청난 혹사를 당하고도 오랫동안 활동 했었으며, 고무적인 것은 2016년 기준 커리어 22년차인 노장인데도 140~150Km을 넘나드는 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30대 중반에 160Km의 강속구를 던지기도 했다. 타자에 비해 투수의 수명이 짧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놀랍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유연성을 중시하는 특이한 자기 트레이닝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말이 있다. 게다가 2001년~2003년은 선발로도 뛰었었다. 실상 마무리로는 3년 연속 130이닝을, 선발로는 200이닝까지 던진 적이 있을 정도로 레전드급 혹사의 아이콘이다. 다만 커리어에 비해서는 상운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전성기 때 두 부문에서 경쟁을 하다가 한 부문 빼고 꼭 경쟁자에게 밀리거나,[* 1998년 구원&평균자책점 - 정명원에게 평자책 밀려서 2위, 1999년 구원&평균자책점 - 진필중에게 구원 밀려서 2위. 99년의 경우 세이브는 1위였으나 진필중이 구원승으로 커버치는 바람에 밀린 것이다.] 한 부문에서 경쟁하다 아예 밀려버리곤 했다.[* 1997년 구원 - 이상훈에게 밀림, 2002년 투수 골든글러브 - 송진우에게 밀림.] 게다가 큰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여 포스트시즌 경력은 많은데 MVP 한 번 수상한 적이 없다. 그의 속구는 뱀직구라 불리며, 속구를 던지면 심한 테일링이 걸리면서 공이 뱀 같이 들어온다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게다가 제구까지 되니 무시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덕에 전성기 때는 [[오승환]]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특급 마무리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9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마무리라 불리던 [[진필중]]에 대적했던 유일한 마무리 투수였기도 하다. 다만 전성기 중무리 활동과 선발 전향으로 인해 세이브 수에서 꽤 손해를 보았다. 일본으로 진출하고는 단 4년만에 100세이브를 돌파했으며 야구르트에서 특급 불팬으로 활약을 펼쳤으며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메이저리그 커리어가 없는 선수가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에 승격할 정도이면 그의 자신감과 실력 또한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오승환|발도 빨라 대주자로의 가치도 있는 선수이다.]] --예?-- 국내 투수들 사이에서는 사이드암의 전설로 통한다. 이는 많은 사이드암 투수들이 임창용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이 잘하면 제2, 제3의 임창용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원판 임창용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단점으로 지적되는 건 큰 경기에서 좋지 못하다는 점인데,[* 통산 포스트시즌에 37경기 출전하여 72.0이닝 1승 6패 9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13. 승패와 평균자책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정규시즌 성적에 비해 좋지 않고, 특히 중요한 순간에 임팩트 있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서 체감상으로는 더 낮게 평가되는 감이 있다.] 분명 해태 시절까지만 해도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중 무려 3세이브'''를 거두는 등 제 몫 이상은 하는 선수였으나 1999년 삼성에 넘어간 이후부터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친 적이 별로 없었다. 특히 99년 플레이오프 당시 [[경기는 삼성 쪽으로 기울고]]에서 탈탈 털렸던 게 트라우마였는지 일본 진출 전까지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시즌 때보다도 못한다고 욕을 들어먹곤 했다.[*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상대팀의 조용준과 비교되며 과하게 까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큰경기에 약했다고 평가받은 삼성시절의 임창용은 역대급 혹사를 받았다는 것도 생각해야 된다. 단적으로 99시즌 임창용은 마무리 투수였음에도 규정 이닝을 채웠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혹사를 당했다. 별명이 애니콜이였던 만큼 제대로된 준비투구도 없이 등판한 적이 많았었고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혹사로 누적된 피로로 인해 구속과 구위저하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컸을 것이며, 위 플레이 스타일에서 언급된 구속과 구위, 멘탈에 비해 떨어지는 컨트롤 능력으로 통타를 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대차출은 많이 되었으나 활약상이 그리 크진 않다. 사실 임창용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애기했듯이 신인 때부터 사생활 관리에 약점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해태 2군 감독이던 [[김성근]]이 임창용의 사생활을 고치기 위해 한 달을 같이 먹고자며 훈련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임창용이 머리 염색을 했던 것을 직접 해결하지 못하고 당시 2군에 있던 [[이순철]] 등의 고참들에게 원상복구를 부탁하는 등, 사생활 문제를 고치진 못했다. [[2003년]] 급기야 [[간통]]사건을 저질렀고, [[2015년]]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큰 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은퇴한 뒤에도 세금 체납 및 상습 도박을 저질렀다. 의외로 행운아 기질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을 터뜨리고 쫓겨난 게 큰 행운이 되어 여론의 호전과 함께 [[KIA 타이거즈|고향팀]]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 [[2013년]] 미국 진출 당시 소속팀 [[시카고 컵스]]의 리빌딩에 힘입은 빠른 승격과, 최종적으로 [[마이클 보우덴|자리가 나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에 콜업될 수 있었던 것을 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임창용의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수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노력을 보여주듯 임창용의 통산 '''WAR은 54.71'''로 2022년 기준 투수 중에서 '''5위이며''' [[https://m.sports.naver.com/kbo40/legend/40|[KBO 40주년] 프로야구 레전드 40]]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임창용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지라 시상식은 열리지 않았다.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