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를란트 (문단 편집) == 역사 == 기원전에 이 지역에 먼저 정착한 민족은 [[켈트족]]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기원전 8세기경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게르만족]]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이 지역을 포함한 서남부 독일과 북부 프랑스까지 이동해와 정착했다. 한편 [[로마 제국]]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진출하여 로마 제국에 복속시켰고,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그렇게 정해진 로마 제국과 게르마니아 국경선에서 자르 지역은 아슬아슬하게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어 갈리아 벨기아 속주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많은 게르만족이 국경으로 넘어 이주해왔다. 또한 로마 제국 본토에서 이주해온 [[로마인]]도 살게 되었다. 4세기 후반 [[훈족]]의 도래로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특히 406년 겨울 그믐날 [[수에비족]], [[반달족]], [[알란족]], [[부르군트]]족 등의 게르만족의 [[라인강]] 도하로 본격화되었다. 이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였고, 서로마가 멸망한지 몇년 후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독일)에 귀속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은 910년 [[독일 왕국]]으로 이어졌고,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다. 이 지역은 독일 5대 [[부족 공국]] 가운데서 상 [[로렌 공국|로트링겐 공국]]에 해당하지만 상 로트링겐 공국은 초기에 여러 독립적인 영주국으로 분열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 자르 지역은 [[메스(프랑스)|메츠]] 주교가 지배했으나, 1080년 [[하인리히 4세]] 황제가 제국직할령으로 선언했고, 라이닝겐 가문이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중세]] 성기로 가면서 가톨릭의 힘이 강해지며 [[마인츠 선제후국|마인츠 대주교]]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가 다시 제국직할령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라이닝겐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와의 혼맥을 통해 세력을 키우기도 했으나 [[대공위시대]]에 라이닝겐 가문의 대가 끊겼다. 그리고 라이닝겐 가문의 사위였던 코메르시 가문이 이 지역을 물려받아 한때 다스렸다. 그러다가 1393년 [[나사우 가문]][* 중세 독일 [[프랑켄]] 지방에서 성장하여 한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출하기도 한 중세 독일 명문 가문이다. 현재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의 왕실이기도 하다. 룩셈부르크의 왕실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장자 계열, 네덜란드의 왕실인 [[오라녀나사우 왕조]]가 차자 계열이다.] 이 이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나사우 가문의 통치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접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30년 전쟁]] 이후로 [[프랑스 왕국|프랑스]]는 이곳에 여러번 공격을 감행했다. 대대적인 공격만 1635, 1676, 1679, 1734년 무려 네 차례. 이는 [[루이 14세]]를 비롯한 당시 [[부르봉 왕조]] [[프랑스 국왕]]들이 [[라인강]]을 프랑스의 국경선으로 삼는 팽창적 영토 확장 정책을 추구했던 것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나사우 가문의 자르브뤼켄 백국은 17세기 이후 본격화된 프랑스의 수차례에 걸친 외침을 다른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들의 도움을 받아 방어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797년 결국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고, 자를란트 지역은 일시적으로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의 몰락|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회의]]에서 이 땅은 독일로 반환되었고 자르브뤼켄 백국은 [[프로이센 왕국]]령으로, 자르브뤼켄의 동쪽 지역은 [[바이에른 왕국]]령으로 편입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1814년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의 1792년 국경을 기준으로 프랑스 영토를 줄이는 와중에서도 자를란트 지역은 프랑스령으로 남을 뻔 했으나 [[빈 회의]]도중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1790년 1월 1일 현재 국경으로 프랑스 영토를 축소시키기로 합의 결국 [[백일천하]] 후 이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과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로 돌아갔다.] 이후 [[나폴레옹 3세]]시절이었던 프랑스는 1865년경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 기운이 감지되자 우호적 중립을 대가로 자를란트를 요구했으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애매한 답을 내놓으며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되 프랑스의 우호적 중립은 유지시켰고, 이로 인해 빚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갈등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고, 자르 지역은 이 전쟁의 결과 세워진 [[독일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 현재의 자르(Saar) 지역은 [[자르브뤼켄]]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 왕국령와 그 동쪽의 [[바이에른 왕국]]령의 월경지의 남부를 합친 것이며, 자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을 지나는 모젤강의 지류인 자르강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에서는 여길 주로 자르브뤼켄 지역이라고 했지, 자르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자르브뤼켄이라고 하면 바이에른 왕국령이 제외되는데, 프랑스는 이 두 지역을 합쳐서 발음하기 어려운 자르브뤼켄을 대충 줄여서 사르(Sarre)라고 불렀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 지역을 먹을 야욕을 가진 프랑스의 주도로 본격적으로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의 두 월경지를 합쳐 자를란트라는 통합된 지역 개념이 확립되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르 분지 지역]](Saarbecken gebiet)이라는 이름의 [[국제연맹]] 감독 하 자치지역이 되었다. 자르 지역의 풍부한 석탄, 철강석 등의 자원 때문에 프랑스는 침략국 독일의 영토인 이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고자 했고, [[영국]]의 동의까지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협상국, 특히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기에 [[독일인|독일계]]가 대다수였던 인구구성을 무시할수 없었고, 결국 미국의 제동으로 한발 물러서 1920년부터 15년간의 국제연맹 관할이 결정된다. 하지면 당연하게도 여전히 이러한 조치는 독일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자르의 독일 복귀에 대해서는 독일내 정파를 불문하고 한 목소리를 내기에 이른다. 자를란트는 명목상 국제연맹 관할이었지만, 사실상 프랑스의 관할이었다.[* 비슷한 경우가 [[단치히]]인데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로 할양하고자 하였으나 인구의 95%가 독일계라 [[단치히 자유시|국제도시 산하 자유도시]]로 정했고 프랑스가 자를란트를 통제했듯 폴란드는 세관 통제권, 군대 주둔권 등을 부여받아 통제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인 출신 위주로 구성된 군대를 진주시켜 자르 지역에 주둔시켰으며 이 지역의 석탄과 철강을 사용했다. 또 자르 지역을 프랑스에 동화시키기 위해 프랑스어 공립학교를 설치하고, 1923년부터 프랑스 화폐만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1925년 1월 10일에 프랑스 관세 지역에 통합시키는 일들을 했다. 그에 반발한 이들이 1925년 6월 19일에 주도 자르브뤼켄에서 4만여명 규모의 독일 영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자르 지역의 모든 정당은 독일로의 귀속을 지지했다. 프랑스에선 투표가 일어나면 독일로의 합병이 뻔했기 때문에 투표 연기나 뭉개기 전략으로 외교전을 폈으나 결국 [[국제연맹]]의 관할이 종료되는 시점인 1935년 [[1월 13일]] 독일로의 귀환 문제에 관한 주민투표 [[자르 국민투표]]가 실행되었고, 투표 결과 독일 합병 91%, 국제연맹 잔류 8%, 프랑스 합병 1%로 독일로의 복귀가 결정되었다. 1935년이 [[나치 독일|나치 정권]] 때라 자를란트 합병을 [[나치]]의 음모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국제연맹의 감시 하에서 치러진 민주적 선거이기 때문에 나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쨌든 나치 정권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인데, [[독일 공산당|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 좌파에서 현상 유지를 주장했는데 투표 결과가 저렇게 나오니 거의 박멸되다시피한 공산당과 사민당 계열은 매국노라고 욕을 퍼먹었다. 이곳은 독일계 지역에다가 16~18세기에 걸쳐 프랑스령으로 편입된 [[알자스-로렌]]과 달리 지속적으로 독일계 국가가 통치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편입되려는 여론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극초반에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일시적으로 이곳 자르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형식상이나마 자신들이 폴란드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대략 10km 가량을 전진하는 시늉만 하다가 다시 요새화된 기지로 돌아오는 [[가짜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프랑스 침공]]이 독일의 승리로 끝난뒤 자르 지역은 일시적으로 [[알자스-로렌]]과 같은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독일이 패망한 후 이 지역은 미국 관할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의 풍부한 석탄과 철강 자원은 프랑스가 지속적으로 군침을 흘렸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프랑스는 이곳을 프랑스의 영토로 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전 후 자르는 미군 관할지역 내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프랑스는 [[자르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NATO]] 탈퇴로 외교적으로 고립되자 [[서독]]에서는 프랑스를 구슬려서 석탄 채굴권을 프랑스에 보장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를란트를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를란트를 '유럽화'시켜 독립시키자는[* 프랑스와의 경제동맹은 유지하되 범유럽 기관 산하로 들어가 기관의 판무관의 지배를 받는 형식이다.] 안을 서독 정부에 제안했고 서독 정부에게 이에 대한 합의를 받아냈다. 그리고 1955년 [[자르 국민투표|자를란트의 '유럽화'를 결정하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찬성 32%, 반대 68%로 기각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독일의 경제 성장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자를란트 주민들이 사실상 독일로의 귀속을 원한다는 결과와 다를 것이 없어서 결국 1956년 독일과 프랑스는 [[룩셈부르크]]에서 자를란트를 독일로 반환하는데 합의했고 1957년 자를란트는 독일의 연방주로 가입하게 되었다. 그 대신 프랑스의 석탄 독점 채굴권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이 곳은 독일이 분단된 시절에도 [[동독]]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자를란트의 [[노인키르헨]](Neunkirchen)은 후기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의 고향이어서, 호네커의 고향을 견학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방문할 수 있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