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바어 (문단 편집) === 근세–현대 === 신 자바어는 16세기, 마자파힛 제국이 스러지고 [[인도네시아/역사#드막 술탄국|드막 술탄국]](1475–1554), [[반튼 술탄국]](1527–1813, 서부 자바), [[인도네시아/역사#칼리냐맛 왕국|칼리냐맛 왕국]](1527–1599, 북부 자바), [[인도네시아/역사#파장 왕국|파장 왕국]](1568–1586), [[마타람 술탄국]](1587–1755) 등에 의해 자바의 이슬람화가 한창이던 때 형성되었다. 마타람 술탄국의 서부 원정에 따라 자바어는 자바섬 서부로도 퍼져나갔으며, 문어로는 19세기까지 순다어 사용 지역에서조차 많은 경우 자바어 또는 [[말레이어]]를 사용했을 정도로[* 물론 [[순다어]] 역시 카위 문자에서 발전한 독자적인 [[순다 문자]] 및 문학 전통을 갖추고 있었지만, 자바어나 말레이어에 비하면 양적, 질적으로 밀리는 편이다.] 자바섬에서 압도적인 문화적 권위를 갖추게 된다. 이슬람화를 겪었으므로 많은 [[아랍어]] 및 [[페르시아어]] 기원 외래어가 자바어로 유입되었고, 이때의 자바어는 현대 자바어와 함께 연속체를 이룬다. 그러나 이슬람화를 겪기는 했어도 천 년 이상 이어진 자바화된 힌두교–불교 전통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며, 자바의 무슬림들은 이를 새로운 외래 종교인 이슬람과 융합하여 독특한 혼성 문화를 형성하였다. 남아 있는 기존 전통의 예로 대표적인 것은 바로 자바 문자인데,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어 사용 지역에서 이슬람화를 거치며 [[아랍 문자]]를 거의 차용한 [[자위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과 달리 자바에서는 팔라와 문자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해 온 자바 문자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이슬람 자바 문학은 파시시르(pasisir, 자바어로 '해안') 문학이라고 불린다. 이 시대에는 해안에 위치한 [[수라바야]], 그레식, 드막, 즈파라, 치르본, [[반튼]] 지역이 문학의 중심이 되어 이곳에서 수많은 작품이 저술되었으며, 자바섬 바깥에서도 자바어 문학은 일정한 영향력을 획득하여 [[롬복섬]], [[팔렘방]] 등지에서도 독특한 지방색을 가진 문학 작품이 나왔다. 파시시르 문학의 범위는 매우 다양한 예술로서의 문학을 포괄하는데, 자바 고유의 [[판지 설화]]의 여러 변주가 가장 유명하고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외에도 아미르 함자(Amir Hamza)의 이야기를 다루는 《함제나메》의 파생 작품들, 아지 다르마(Aji Darma)나, 유숩(Yusup)의 모험 서사를 비롯하여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유형의 서사와 각종 운문이 서술되고 읽혔다. 파시시르 시대 이래로 종교 문헌, 법률 문헌이나 연대기, 교훈서뿐 아니라 회화, 음악, 건축, 공예 등 예술에 대한 문헌, 전통 의술, 약초학 문헌, 그리고 언어에 대한 다양한(문법, 운율, 방언 등) 문헌이나 백과사전적 저술 등 당대 자바 문명과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저술도 작성되어 근세 자바 사회를 연구하는 풍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힌두-이슬람 과도기인 15~16세기 자바에서 기록된 많은 문헌,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과거의 문헌은 자바의 정치적, 종교적 격랑 속에 소실되었고, 서지 목록이나 다른 문서에 그 존재만 남아 전해지는 경우도 많다. 소실된 자바 고문헌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원본을 발견할 희망이 별로 없더라도 그 자체로 역사학자와 고문헌 연구자의 관심을 끌며 간혹 진행되어 왔다. 특히 흥미로운 소실된 자바 고문헌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 지역에 도착한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포르투갈]] 국왕에게 1512년 4월 1일 보낸 편지에 언급된 '자바의 [[세계지도]]'가 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자바어로 지명이 적힌 이 지도에서는 포르투갈, [[희망봉]], [[브라질]], [[홍해]], 페르시아해, [[자바]], [[말루쿠 제도|향료 제도]], [[태국|시암]], [[중국]] 등과 다양한 뱃길, 육지의 왕국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12년에 이 지도가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측은, 이미 당시 자바에서 포르투갈의 항해도를 입수하여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정보들(브라질의 존재 등)을 기존 자바의 전통 지리학 지식에 덧붙여 자바 기준으로 새로운 세계지도를 작성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지도는 편지 속에 알부케르크의 글과 알부케르크의 동료가 아주 부분적으로 모사한 형태로만 남아 있다.[* Benjamin B. Olshin, "A sixteenth Portuguese report concerning an early Javanese world map," ''História, Ciências, Saúde-Manguinhos'' II no. 3 (1996): 97-104.] 한편 이 시기 자바 고전의 영향력은 전통적인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테두리를 넘어서까지 퍼져, [[아유타야 왕국]] 시대와 [[짜끄리 왕조]] 시대 [[태국]]에서도 판지 설화가 각색된 《이나오》(อิเหนา)가 여러 번 창작과 재창작을 거쳐 태국 고전 문학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이 설화가 태국으로 유입된 정확한 경로와 시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대체로 자주 지적되는 바는 아유타야 중기 또는 말기(16–18세기)에 남부 접경 지대 [[파타니]] 지역의 말레이계 무슬림들이 자바 설화를 텍스트 또는 구전으로 접하여 이에 익숙해졌고, 이것이 어떤 경로로 태국 내륙으로 전파되었으리라는 것이다.[* Stuart Robson, "Panji and Inao: Questions of Cultural and Textual History," ''Journal of The Siam Society'' 84 no.2 (1996): 39-53.] 18세기와 19세기에 자바 문학에서는 고전 자바 문학 전통의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문학의 중심은 [[수라카르타]]와 [[욕야카르타]]를 비롯한 내륙의 궁정으로 다시 이동하였고, 이슬람 이전 고대 자바의 카카윈이 다시 읽히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 '푸장가'(pujangga)라고 불리는 수라카르타 작가들의 명성은 온 자바로 퍼졌으며 이에 가려 상대적으로 파시시르 시대 작가들은 잊히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특히 야사디푸라(Yasadipura)의 가문에서 배출된 세 명의 시인, 야사디푸라 1세(Yasadipura I, 1729–1802), 야사디푸라 2세(Yasadipura II, ?–1844, 야사디푸라 1세의 아들), 롱가와르시타(Raden Ngabehi Ronggawarsita, 1802–1873, 야사디푸라 2세의 손자)가 수라카르타 궁정 시인으로 유명하였다. 롱가와르시타의 활동 시기는 네덜란드가 디파나가라 전쟁을 거쳐 자바의 식민화를 완료한 시기와 겹치며, 롱가와르시타는 시대를 되돌아보며 전통적 질서의 퇴락과 상실에 대한 비가 〈[[칼라티다]]〉(Serat Kalatidha, 1860년 전후)를 썼다. 이는 지금까지도 자바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롱가와르시타는 자바어 문법서 《파라마사스트라》(Serat Paramasastra)를 쓴 문법가이기도 했고,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의 이야기를 옛 힌두-불교 시대 자바의 상황에 맞게 각색한 서사시 《왕의 서》(Serat Pustaka Raja) 37권을 비롯해 다른 여러 중요 작품들도 남겼다.[* 롱가와르시타와 19세기 자바학에 대해 영어로 접할 수 있는 추가적인 정보는 다음을 참조하라. Takashi Shiraishi, "Javanology and the Age of Ranggawarsita: An Introduction to Nineteenth-Century Javanese Culture," in ''Reading Southeast Asia''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0), 75-108.] 〈칼라티다〉 외에 주요한 19세기 자바 문학 작품으로는 [[술탄 아궁]] 시대의 17세기 자바를 배경으로 한 [[서사시]]로서 자바의 《[[오디세이아]]》라고도 할 수 있는 《[[츤티니]]》(Serat Centhini, 1814, 당시 왕자였던 파쿠부워노 5세의 총괄하에 파쿠부워노 5세 및 롱가수트라스나Raden Ngabehi Ronggasutrasna, 야사디푸라 2세, 사스트라디푸라Raden Ngabehi Sastradipura 3인의 궁정 시인이 저술),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의 중요 분기점이었던 기얀티 조약 전후 사정을 다룬 《바밧 기얀티》(Babad Giyanti, 1757–1803, 야사디푸라 1세), 마자파힛의 멸망을 다룬 《다르마간둘》(Serat Darmagandhul, 1900, 키 칼람와디Ki Kalamwadi[* 필명이며,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양한 추측을 낳았는데, 저자를 특정하는 논쟁은 2019년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발표 후 롱가와르시타가 사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키 칼람와디가 롱가와르시타와 동일 인물이며, 《다르마간둘》이 롱가와르시타의 미발표 유작이라고 추측하였지만, 특별한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등이 있다. 한편으로 19세기 자바 작가들은 자바어를 학습하고 자바 문학 전통을 연구한 [[네덜란드]] 학자들에게 자극받기도 했다.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자바에서 유럽과의 본격적인 문화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19세기에 비로소 [[성서]]가 자바어로 번역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인도네시아라는 정치적 단위가 상상되기 시작하여, 공용 구어이자 문어로서 [[인도네시아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였고 자바어는 상대적으로 자바라는 한 지방의 토착어로 격하되었다. 한편으로 [[순다어]], [[마두라어]] 등 자바어에 밀려 문어로 잘 사용되지 않던 다른 주변 지방의 토착어들도 다시 근대 인쇄술의 힘을 빌려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20세기 인도네시아의 주된 문학적 흐름은 인도네시아어로 이어지게 되었으나, 최근까지도 많은 작가들은 자바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자바 출신이며 자바어 고전 문학의 전통은 널리 계승되고 있다. 또한 자바어로도 많은 문학 작품이 번역 및 저술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