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위안런 (문단 편집) == 생애 == [[청나라]] 말기인 [[1892년]]에 [[톈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장쑤성]] 출신이었다가 톈진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자오위안런은 [[1910년]]에 강자북관장학금[*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창설된 장학금이었다.]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미국]]의 [[코넬 대학교]]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이후, [[언어학]]과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모국어인 [[중국어]] 이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와 약간의 [[일본어]]는 물론, [[고대 그리스어]]까지 능숙한 그야말로 당대의 먼치킨이었다. [[1920년]]에는 [[중국]]으로 돌아가서 [[칭화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다가 1년만에 돌아갔는데, [[1925년]]에 다시 [[중국]]에 되돌아왔고 이때 [[생활의 발견]]의 저자로 유명한 [[린위탕]]과 함께 [[국어라마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언어유희 시인 [[시씨식사사]]도 이때 처음 발표했다. 당시에 [[중국어]]의 구어와 문어를 일치시키자는 운동인 [[백화문]] 운동이 일어났는데 [[중국어]] 백화문은 [[로마자]]로 표기해도 괜찮지만, 전통 [[한문]]은 로마자로 표기하기에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조만 다른 shi 음만으로 된 시를 지은 것이다. 덕분에 현대의 [[표준중국어]]는 이 백화문을 중심으로 문어를 정리했다. [[1920년]]에 물리학자인 양부웨이와 결혼하였고, 그 이후 [[중국]]에 정착해 살면서 이른바 [[신문화운동]][*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구습들을 타파하려는 계몽 운동이었다. [[브나로드 운동]]의 중국 버전인 셈이었다.]에 열을 올렸다. [[1938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이때 하필이면 [[중일전쟁]]이 발발한 바람에 [[1945년]]까지 미국에서 돌아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사이 자오위안런은 미국 언어학회의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이후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국공내전]]이 일어나 못 돌아가고 있다가 [[1949년]]에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이 공산화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중화민국]]의 지지자였던 자오위안런은 귀국을 단념하고 [[1954년]]에 정식으로 미국에 귀화했다[* 1950년대부터 [[타이완 섬]]으로 들어간 중화민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국적도 유지하였다.]. [[1966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교수로 임용되자 이곳에서 [[언어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모국인 [[중국]]은 잠깐 동안 몇 번 방문하기만 했을 뿐, 끝내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않다가 [[1982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