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헝티 (문단 편집) === [[담조전쟁]]과 호남자치의 실패 === 마침내 1923년 6월, 세금 수취 문제로 탄옌카이 파 장령들이 아편에 대한 세금 문제로 타조군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자오헝티는 토벌령을 내리고 군사적 대응을 하려 했으나 호남에서 재집권을 노리던 탄옌카이는 호남성장 겸 상군총사령의 자격으로 호남에 출병하였다. 탄옌카이 파 장령들이 속속 탄옌카이에게 합류하면서 자오헝티는 최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자오헝티는 스스로 호헌총지휘에 취임하여 탄옌카이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8월 31일, 자오헝티의 주력부대가 탄옌카이에게 투항하면서 자오헝티는 장사를 잃고 북으로 퇴각하고 탄옌카이가 장사에 입성하자 탄옌카이의 장사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대회가 열렸다. 자오헝티는 반격을 가해 9월 13일 장사를 탈환했으나 화의가 결렬되고 중립을 지키던 루디핑이 탄옌카이에게 합류하면서 자오헝티는 이대로 몰락하는 듯 했다. 결국 자오헝티는 우페이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우페이푸는 악주에 양호경비총사령부를 설치하여 탄옌카이를 축출하고 자오헝티 정권을 회복시켜주었다. 세력을 회복한 자오헝티는 탄옌카이 파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감행하고 탄옌카이에 합류한 군장과 의원들을 제명했다. 또한 탄옌카이에게 지원을 했던 상회에 대해 탄압을 가해 상회 회장과 부회장을 재선을 요구했다. 그리고 학생과 노동자 단체들에 대해 기존의 유보적인 입장을 버리고 가혹한 유혈탄압을 가했다. 자신의 생존을 도운 직군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받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우페이푸는 자오헝티에게 호남자치 취소를 강요했고 1924년 4월 직계 장령들이 호남성헌을 공격하면서 자오헝티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결국 자오헝티는 1924년 4월 15일 성헌은 유지하되 개헌여부를 민의에 따르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아 11월 20일 성헌을 개헌했다. 이에 따라 1923년 [[회선 사건]] 이후 발표된 차오쿤 헌법에 호남성헌이 편입되어 호남의 독립적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호남의 연성자치운동은 실질적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자오헝티는 1924년 [[북경정변]] 이후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들어서자 1925년 [[선후회의]] 회원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