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당 (문단 편집) === 원내 자유당의 창당 배경 === 공화민정회는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1951년 5월 통합해 100석이 넘는 의석으로 출범한 거대 원내교섭단체였다. 1950년 11월 무소속구락부에서 이름을 바꾼 바 있던 공화구락부는 통합 바로 얼마 전에 실시된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민국당과 공조해 [[김성수(1891)|김성수]]를 부통령에 당선시켰을 정도로 반이승만 성향이었고, 신정동지회는 완전 친이승만 성향이었다. 공화구락부 의원들은 대체로 [[일제강점기]] 시기의 관료출신, 전문직 종사자로 구성되었으며 전문직 정치인들보다는 초선의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공화구락부가 이후 민주당 신파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신정동지회는 이미지 쇄신이 절실했고[* 당시 신정동지회 소속 의원들 중 국민방위군 지도부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야권 주도권 싸움에서 민국당에 밀리고 있던 공화구락부는 세력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두 세력은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통합을 하게 된 것이었다. 국회의원은 공화구락부가 39명, 신정동지회가 69명으로 신정동지회 측이 훨씬 많았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신정동지회는 약점이 많았기 때문에 신당 작업은 [[오위영]] 등 공화구락부계가 주도했다. 사실 오위영 등이 신당을 만들려고 한 것은 전쟁 직후부터였다. 의원들은 이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서울을 뺏기고 자신만 몰래 피신한 데 대해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왜 내가 책임이 있느냐고 역정을 냈다. 의원들은 국무위원들한테도 책임을 물었다. 그러면서 의원들은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것보다 정당을 조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위영 등의 신당은 1950년부터 모색되었고, 1951년 5월 공화민정회가 발족하면서 신당준비위원 등을 선출했지만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신정동지회계의 내부 사정이 복잡했고, 이승만 지지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위영 등은 신당 작업을 벌이면서 초대 주미대사를 지냈고 미국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장면]] 국무총리(2대)를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한 활동도 벌였다. 이처럼 원내 자유당은 이승만과는 거리가 먼 정당으로 시작했다. 즉, 아래에서 설명할 원외자유당과는 우연히 이름이 같았을 뿐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