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당 (문단 편집) === [[족청]]계 숙청 ===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이범석]]이 아닌 이승만보다도 나이 많은 노인이었던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없다는 뜻. 이범석은 이에 반발하여 부통령 선거에 독자출마하게 된다. 이범석은 자신이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두었다.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걸 확인,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하였지만, 이는 흐지부지된다.[* 이범석과 족청계는 나중에 장택상이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과 부산에서 만난걸 족청 부하들을 통해 입수하여 장택상을 친일파로 몰아 국무총리직에서 해임시켰는데 이것이 밑에서 언급되는 후로이 사건이다.] 이승만은 자유당의 당수·부당수제도를 폐지하고 총재제로 할 것, 중앙위원제로 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당수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총재가 되었으며, 부당수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이범석은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 이승만은 6월 5일 이범석을 반 강제로 여비도 조금밖에 주지 않은 채 외유를 떠나게 했다. 다음 거세 대상은 남로당원이었던 특별징계위원회 위원장 [[신형식]]이었다. 그는 연설장에서의 실언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다. 족청계에 대한 결정적 타격은 [[양우정]]의 구속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의 충실한 이데올로그로 활동했고, (원외)자유당을 만드는 데 공로자였던 양우정은 후로이 사건을 터뜨려 장택상을 실각시킨 『연합신문』 편집국장 [[정국은]]이 간첩 혐의로 8월 말 구속됨으로써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군인)|김창룡]]이 팔을 걷고 나섰다. 10월 17일 족청계였으나 이미 돌아선 [[백두진]]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제출된 양우정 의원 구속동의안이 압도적 표차로 가결됨으로써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이범석의 정치생명은 끝장이 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