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도시 (문단 편집) == 배경 == [[유럽]]의 자치공동체적 도시는 그 기원이 [[고대 로마]]로 소급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미 각 지방 도시에서 [[지방자치]]가 행해져 [[지방의회]]를 형성하여 [[집정관]], [[원로원]], 그 외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명예로운 직위]]' 등을 로마 시와 똑같이 선출하였다. 이러한 자치공동체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곧 무니키피움(Municipium)[* 단순히 읍락이라는 뜻이나, 제국화 되는 로마 초기에는 로마 [[시민]]이 사는 콜로니아(colonia)와 구분되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맹시, 즉 2등 도시를 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국화 된 로마가 전 [[인민]]에게 [[시민권]]을 뿌려서 그러한 구분이 사라졌고, 그 대신 자치공동체의 의미로 변화했다. 무니키피아의 거주민인 무니켑스municeps는 '(시민의)의무자'라는 뜻이었으며, 무니키피움은 '공동 의무'라는 의미가 되었다.]으로, 무니키피움은 현재의 [[지방자치제]](municipality)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자치에 행해지는 모든 비용은 현지 [[사회]]에서 부담했다. 로마는 절대적으로 도시 [[공동체]] 위주의 [[사회]]였다. 한 지역은 중심도시(civitas)가 근처의 촌락을 일방적으로 지배 및 장악하는 형태였으며, 전 로마 [[국토]]의 [[행정]]은 그러한 중심도시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나중에 제국의 유력 [[종교]]로 성장해나가게 된 [[기독교]] 역시 이 도시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교구]]를 편성하였다. 그런데 [[서로마]] 지역 중앙정부가 붕괴하자 이러한 자치도시는 그 자체로 각기 독립적인 [[국가]]가 되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듯 [[고대 로마]]는 공공 조세, 공공부조, 공공재정의 개념이 미약했고 [[투표]]로 선출되는 공직자가 자기 사비로 [[행정]]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무니키피움의 자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미 제국 말기부터 지방행정비용은 물론 중앙정부에서의 소요 증가까지 다방면에서 압박받던 지역 유력자들은 명예로운 경력이랍시고 지방도시에 돈을 뿌려대느니 그냥 자기 [[장원(농업)|대농장과 거기 딸린 요새]]에 틀어박히는 것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시 사회 내 공백이 발생하는 상황에, 도시 자치 정부의 재정적 후원자이자, 도시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준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였다. 스스로 [[관료]] 조직을 갖췄을 뿐더러 신자들로부터 기부받은 재정을 가진 [[교회]]는 곧 도시 정부의 중심이 되었고, 각 도시마다 설치된 주교구의 [[주교]]는 사실상 도시영주가 되었다. 그래서 중세 초기에 도시의 주교를 뽑는 것은 곧 [[시장(공무원)|시장]] [[선거]]에 가까웠고, 도시의 온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사업이기도 했다. 원래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는 각 주교구 별로 주교를 선출하였는데,[* 새 주교구의 탄생도 멀리 [[교황청]]에서 내려보내거나 하는 게 아니라 이웃한 주교에게서 [[사도전승|서품]] 받아 이루어졌다. 이러한 절차는 지금도 마찬가지. 반면 고대 로마의 권역 밖 부족제 사회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아일랜드]] 등의 [[켈트]] 교회는 주교 하 도시단위 주교구가 아닌 부족단위 [[수도원]] 중심의 독특한 종교문화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신실함 외에도 도시 행정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상류층 신분으로서 이를 부담할 여력이 있는지를 선출의 판단 근거로 삼고는 하였다. 이렇게 도시를 책임지게 된 주교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단연 [[로마]]의 [[교황]]일 것이다. 교황 자체가 원래 로마의 주교이며, 곧 [[베드로]]의 전승자로서 교회의 으뜸이 되었는데, [[서로마]] 붕괴와 여러 게르만계 [[부족]]이나 [[사라센]]인, [[노르만족]]의 침입 등 혼란 속에서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와 [[이탈리아]] 각지의 안녕을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렇게 고대 로마 [[전통]] + 가톨릭 교회로 이뤄진, 주교 하 도시 통치 [[조직]]은 그 본질이 도시민의 필요와 [[합의]]하고 결부되었다.[* 그래서 코뮌 운동이 일어나는 동시에 서임권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주교와 도시민의 관계도에 따라서 양자가 교황청의 간섭에 공동대응하거나 역으로 교황과 연대하여 지역교회를 공격하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10~[[11세기]]에 들어 [[서유럽]]의 혼란이 끝나고, [[인구]] 증가와 [[상업]] 발달에 힘입어 도시 및 도시민이 성장하여 새로운 도시들이 생성되었다. 또 중세 초기에 도시의 사법권이나 경영권 등을 주교에게 위임했던 도시들은, 차츰 그 시민들이 그것을 다시 되찾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도시민 간의 서약공동체, 즉 [[코뮌]] 혹은 코무네가 탄생하였다. 이들 조직은 도시의 확산을 따라 서유럽에 더 많이 오밀조밀하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에서 무력을 사용한 도시들도 있고, 주교와 원만하게 합의한 경우도 있고, [[돈]]을 주고 산 경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