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선진당 (문단 편집) == 상세 == 자유선진당은 초기부터 끝까지 [[충청도]]의 자존심을 내세웠지만, 창당 당시의 실상은 [[김종필]]의 정계 은퇴 이후 세가 줄어든 구 [[자유민주연합]] 출신 중 [[대전광역시]] - [[충청남도]] 지역 인물들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충남 연고를 주장했던 전국구급 인물인 [[이회창]]을 중심으로 뭉친 것에 가까워서 세력은 약했다. 참고로, 대전과 충남만 거론되는 데는 다 이유도 있다. [[충청북도]] 지역은 애초부터 자민련의 [[1995년|1995]]~[[1998년]]의 [[리즈 시절]]을 제외하고는 자민련의 [[텃밭(정치)|텃밭]]이 아니고 앞마당 정도였으며[* 이는 전신인 [[신민주공화당]] 시절에도 그랬다.], 17대 총선 이후 자민련의 몰락 후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엎치락뒤치락[* 이럴 때는 열린우리당 - 민주당이 소폭 우세했다.]하는 곳이었다. 자유선진당은 창당 직후인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북 지역 8개 [[선거구]] 중 6개 선거구에만 후보를 냈으나, 겨우 1개 [[지역구]] 승리에 그쳤다. 더군다나 그 1개 지역구도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18대 총선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금고형 이상'을 선고받은 인물들을 전부 공천에서 탈락시켰는데 알선수재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공천에서 탈락했다. 당연히 한나라당에는 갈 수 없으니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려고 자유선진당으로 이적한 것.] [[보은군]], [[영동군]], [[옥천군]] 남부 3군의 지지가 확고한 [[이용희(1931)|이용희]] 의원이 [[당선]]된 것.[* 당시 충북은 민주당이 총 8석 중 6석이라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당의 이념을 보자면 이합집산을 한 끝에 창당한 만큼 각기 다른 세력들의 사정이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당 내 세력간의 구성과 갈등은 구성 세력 문단 참고.] 초반의 자유선진당은 정치적 노선을 보수주의로 하되 [[보수주의]]이지만, 자민련 마냥 [[한나라당]]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으며, [[창조한국당]]과의 교섭을 통해 1년 반 동안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물론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은 원내교섭단체라는 한 배를 타고 있었지만, 사실 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를 들어 [[2008년]]의 [[박왕자 씨 피살사건]] 때 민주당과 비슷한 성격을 띄던 창조한국당은 [[청와대]]의 대북 강경책을 비판하는 논평을 내놓았지만, 한나라당과 비슷한 성격을 띄던 자유선진당은 이 기회에 [[북한]]의 해상에 쳐들어가야 한다고 논평을 내놓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2009년 심대평이 이회창의 당 운영에 반발해 탈당하여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을 계기로 이회창이 2선으로 물러나게 된 이후 자유선진당이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거나 정책을 내놓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뭐 애초에 원내 3당으로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신민주공화당]] 이래의 전략이었으나, 이마저도 특정 정당이 압도적인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여 캐스팅보트의 역할이 컸던 13,15~16대 국회와는 달리 18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다수당[* 당시 자유선진당,친박연대,친박 무소속이 출마하여 보수표를 상당히 잠식했고, 덕분에 일부 선거구에서는 민주당이 어부지리로 당선되기까지 했을 정도였음에도 한나라당만의 의석으로도 과반을 찍을 정도였다.]이었기에 자유선진당의 캐스팅보트 전략은 별 힘을 쓰지 못했고, 이렇게 존재감이 줄어들면서 그보다 의석이 적은 [[민주노동당]]은 물론 원외정당인 [[진보신당]], [[국민참여당]]보다도 의제를 점하는 일이 없어졌고[* 그나마 참여당은 [[유시민]]의 [[존재감]]이 컸으며, 진보신당도 [[노심조]]와 야권통합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정치적 비중이 문국현 대표의 2선 후퇴 이후로 아예 식물정당으로 전락한 [[창조한국당]]이나 당 대표도 없이[*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규택 대표가 탈당한데다가 서청원 대표는 공천헌금 사건으로 인해 당적을 가질 수가 없어서 2010년부터 해산시까지 2년간 노철래 원내대표가 당 대표 직무대리를 맡았다.] 한나라당 멀티 역할을 하던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과 동급으로 전락해 버렸다.[* 창조한국당은 [[문국현]]의 의원직 상실 이후로 문국현계(공성경 등)와 비주류([[이용경]] 등)가 내분을 일으켜서 사실상 잊혀져갔고, [[친박연대]]도 구성원들의 연이은 [[한나라당]] 복귀와 [[서청원]]의 구속과 한나라당과의 합당결의 및 한나라당의 [[유승민]]을 위시로 한 [[친박]]의 부활로 인해서 잊혀져가던 상황이었다.] 정당의 정의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이고, 그 목적이 지지층을 대변하고 정권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유선진당은 원내 3당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기반한' 지지층은 있되 이념적인 지지층은 희박했고, 심지어 의원별로 색도 달랐다.[* 이용희, 권선택, 이상민 같이 민주당에서 넘어온 진보~중도성향 국회의원들과 이회창, 이인제 같은 보수성향 국회의원들이 한 당에 있었다.] 한 마디로 구시대적인 지역 분할 구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격이었다. 2011년에 [[변웅전]] 전 대표가 한 발언이었던 "[[경상도]]에는 당이 하나밖에 없는데, [[충청도]]에는 당이 여러 개 있다"는 발언도 자세히 곱씹어 보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의도가 충만한 발언이다. 그나마 당시 민주당과 [[새누리당]], 혹은 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 이런 류의 발언이 나왔다면 당장 전국 단위로 욕을 먹었을 것인데[* 변웅전이 해당 발언을 하기 무려 11년 전이었던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노무현]]이 부산에서 돌풍을 일으키자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했던 [[허태열]]은 당시에도 크게 욕을 먹었음은 물론, 해당 발언을 한 지 2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노무현의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이 언급될 때마다 같이 언급되면서 까이는 신세가 되었다.], 자유선진당은 [[인지도]]도 낮고 존재감도 약해서 그냥 넘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