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카르타 (문단 편집) === 인구 ===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 바타비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수라바야]]보다 인구가 적은 제2도시였다. [[1900년]] 인구는 11만 6천 명으로 바타비아는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도 당시 이미 60만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했던 [[방콕]]이나 22만 인구로 인구가 아주 많지는 않아도[* 싱가포르는 나라가 포화될까 봐 [[해협식민지]] 시절부터 출산을 그리 장려하지 않아 인구가 급증하지는 않았다. 현재도 싱가포르의 인구는 [[싱가포르 여권]] 소지자는 350만 명(2018)에 불과하고 [[영주권]]자와 장기 비자 소지자까지 합쳐야 겨우 560만 명(2018)이 된다.] 비교적 잘 개발된 [[싱가포르]]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규모가 작은 도시였다. 그러나 20세기 전반 식민 치하에서 도시 개발과 이민 장려 정책이 펼쳐지면서 바타비아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1930년]] 바타비아의 인구는 53만 3천 명을 기록해 30년 만에 5배 가까이로 폭증했고, 수라바야를 앞질러 싱가포르[* [[1931년]] 식민지 시절에 56만명이 됐는데 [[중국 대륙]]과 [[말레이 반도]] 본토에서 이민을 받으면서 인구가 늘어났다.]와 비슷해졌다. 식민지 시대 수라바야나 반둥 등 다른 도시들보다 더욱 개발이 집중된 바타비아는 이 무렵 근대 대도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후에는 인구가 80만에서 100만을 오가는 정도였지만 [[1950년대]] 초부터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1950년대 전반 인구가 이미 100~200만에 달해 자카르타는 [[동남아시아]]에서 [[방콕]], [[마닐라]], [[양곤]], [[사이공]]과 함께 인구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도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비하면 인구가 크게 적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로도 자카르타는 개발의 중심이 되어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자카르타의 인구는 1961년 291만, 1971년 458만, 1980년 650만 명을 거쳐 1990년대 중반에 900만을 넘어섰다. 2011년 기준 마침내 천만을 넘겨 10,187,595명에 이르렀지만 인구 증가세는 출산율이 줄어서 [[1990년대]]부터 꺾였다. 2021년 중반 인구 추정치는 약 1061만 명이다. 도심이 조금 과포화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꽤 인구가 많다. 면적은 660km^^2^^로, 서울보다 조금 더 큰 도시에 조금 더 많은 인구가 거주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것처럼 포화되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서울 수도권도 2000만명의 인구가 좁은 땅에 낑겨 살아 포화된 느낌이 크지만 자카르타 수도권은 더하다.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이주민이 몰리는 곳이므로 인구 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자바인]] 36%, [[브타위인]] 28%, [[순다인]] 15%, [[중국계 인도네시아인|화교]](중국계) 7%, [[바탁인]] 3%, [[미낭카바우인]] 3%, [[말레이인]] 1%, 기타 7%가 섞여 산다. [[블룸버그 통신]]은 2018년 10월 9일에 자카르타는 2030년에 [[도쿄]]를 제치고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될 거라는 전망을 내놓았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3&aid=000884654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