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광나이 (문단 편집) ===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복건사변]]까지 === 결국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하야하고 4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쑨커]]가 [[행정원장]]에 취임하여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쑨커 내각은 경제위기와 더불어 1932년 1월에 발생한 [[제1차 상하이 사변]]에 직면하여 와해되었다. 그 뒤를 이어 [[장제스]]와 손잡은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에 취임하였으며 장제스가 다시 권좌에 복귀하였다. 장광나이는 19로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세차례나 격퇴하였으나 결국 4번째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송호정전협정]] 체결 후 항일 성향이 짙은 19로군을 상하이에서 이동시키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복건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4차 초공작전]]에도 동원되어 홍군과 교전하였으나 계속 피해가 발생하면서 초공에 불만을 품었다. 1933년 천밍수가 뇌물 수뢰 사건으로 해임되면서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는 처우에 매우 불만을 품게 되었다. 복건성으로 이동한 19로군은 일본 상품 보이콧 운동, 반일 대중 시위를 원조하면서 항일 전단지 배포, 일본 화폐 소각 시위 등을 벌였다. 1932년 12월, 장광나이는 복건성장 겸 복건성 민정청장에 임명되었고 이에 힘입어 복건성에서 더욱 항일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복건성을 광동파의 집결지로 만들어서 복건성 정부에 광동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쓰질 않았다고 한다. 11월 20일, 급기야 장광나이는 차이팅카이, 천밍수, 그리고 호남 사건으로 실각했던 리지선과 힘을 합쳐 [[복건사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장광나이는 중화공화국 인민정부 위원에 취임했다. 하지만 [[제5차 초공작전]]에 나서고 있던 장제스는 50일만에 복건사변을 간단히 진압했고 장광나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11월 23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장광나이의 국민당적을 영구 박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