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기려 (문단 편집) == 업적 ==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설,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은 의료혜택을 입도록 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은 1955년 설립된 부산노동병원의 의료보험조합이다. [[http://www.hira.or.kr/sViewer/index.do?ebookSn=263|"의료보험의 발자취"]], 의료보험연합회, 1997.]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ET 할아버지로 유명해지는 [[채규철]], 김서민 등과 함께 설립. 1977년 의무보험이 시작되기 전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시절 유일하게 성공한 의료보험조합으로 청십자운동이라는 전국적인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그러나 청십자의료보험을 통해 만든 병원은 아직 [[부산]] 전포동에 청십자병원(행복한병원)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은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출현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성공했던 임의의료보험조합으로 전국적으로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와, 의료보험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큰 인식의 전환을 마련시켰다.[* 1963년 [[의료법]]에 따른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은 중앙의료보험조합인데 업무를 시작한지 몇개월 되지 않아 납부문제 등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는다. 이후 몇개 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으나, 임의가입의 제도적 한계와 불신의 문제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비결은 국가에서 1억원 가까운 막대한 예산투입과 당시 부산시의 지방비를 지원한 것, 그리고 부산사람들의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은 신뢰도와 상대적으로 높은 납부율로 지적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의료보험 도입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한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현행 의료보험의 기초가 되었으며,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한 의료환경변화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그가 한국 의료계에 끼친 영향은 독보적이라고 한다. 반면, 의료보험연합회는 1997년 발간한 [[http://www.hira.or.kr/sViewer/index.do?ebookSn=263|"의료보험의 발자취"]]에서 청십자의료보험에 대해서는 1968년 이후 시작된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했던 사례로 격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를 매웠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의료보험의 도입에 대해서는 당시 보건사회부 중심의 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의료보험을 도입한 의료행정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외과의사였는데, 이러한 공적으로 장기려는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 등을 받았다. 노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백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집 한칸 없이 협소한 옥탑방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1943년 국내 최초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 한국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 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