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기려 (문단 편집) == 여담 == * 정부에서 [[의료수가]]를 책정할 때 장기려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참고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일종의 봉사단체의 성격으로 의료수가 중 인건비 부분이 빠진 상태였고 이것은 현재 의료수가가 낮아지게 된 요인이라는 설이 있다. 한국의 의료수가는 미국을 제외한 동남아 국가보다도 낮은 상태로 대부분 의료기관이 보험수가 이외의 방법으로 수입을 올려 유지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선의로 인건비를 뺐지만 이는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낮은 의료수가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니, 마냥 좋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장기려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이후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보강된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수가가 계속 낮아졌는 데, 이에 상응하는 만큼 의료인들의 수익이 보장되느냐를 놓고 찬반 논쟁이 한번씩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이를 알만한 의료인 출신 방송인 한 명이 이를 무시한 발언을 하다가 심각한 후폭풍을 맞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 한국의 경우 장비를 사용하는 의료비용이 의료인이 직접 참가해서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의료비용보다 높다. 실제 [[맹장염]] 수술수가는 26만원(2015년기준)인데 비해 [[MRI]] 는 40-100만원에 달한다.[[http://www.medicaltimes.com/News/1089754|기사보기]] * 반면 의료보험연합회에서 발간한 [[http://www.hira.or.kr/sViewer/index.do?ebookSn=263|"의료보험의 발자취"]]에 따르면 당시 수가책정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당시 복지연금국을 중심으로 수가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당시 수가조사 데이터는 국립의료원, 서울대학교병원, 연세의료원, 가톨릭의대성모병원, 적십자병원, 고려병원, 한양대부속병원, 순천향병원, 백병원, 필동성심병원, 을지병원의 의료수입내역을 기반으로 하였다고 한다. 또한 종합된 진료행위에 대하여는 모든 행위를 과별로 분리하여 과별 퍼센티지를 부여한 다음 각 행위의 난이도를 상대평가하였다. 가장 난이도가 높은 시술에 일정한 기준점수를 부여한 다음 각 행위들을 그에 비교하여 배점한 난이도 평가에는 과목별로 10명씩의 전문의들이 참여했고 이 점수표에서 이상치를 제외한 나머지를 평균하여 최종치를 결정하였다. 같은 방식으로 소요시간과 빈도가 조사되었는데, 소요시간은 시간이 많이 들수록 빈도는 드물수록 일정한 가중치를 부여하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경감하였다. 결국 난이도가 주요변수가 되고, 시간 및 빈도가 조정변수가 되는 일정한 공식에 조사치가 대입되어 각 행위의 수가 수준이 결정되었다. 보건사회부는 완료된 수가을 검증하기 위해서 국군통합병원 의료수가를 조사하여 일일이 작업결과와 대비하여 일부 내용을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당시 수가책정원칙에 따르면 지방차별제를 실시하고 의료보험수가는 단체계약수가이고 향후 보험실시로 잠재수요가 유효 수요화하여 환자수가 증가될 것을 감안하여 관행수가보다 낮게 책정하되 당시 대기업 공제조합과 의료기관과의 계약수가가 관행수가의 80% 선이었으므로 이보다 다소 낮은 75%선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수가는 관행수가의 약 55%수준이었으나 서울지역 종합병원을 기준으로 한 수가였기에 가산율 20%와 약가 등을 감안했을 때 결국 제정원칙에서 정한 75%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제 검사료의 경우 제정수가가 당시 국립의료원이나 모 대학부속병원의 관행수가보다 높았다고 한다. * 상기 언급된 의료보험연합회의 의료보험의 발자취는 97년도에 작성되었다. 이 문건은 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된 1977년의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부와 보험연합회의 행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성된 자료이며, 이로 인한 관 위주의 기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 상기 문건의 내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설 민간 의료 보험이었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내용을 문건에 수페이지의 분량을 따로 할애하여 치적을 기렸다는 점을 비추어 본다면, 장기려의 청십자 의료보험이 현재 국민건강보험에 끼친 영향을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의료 수가의 경우 관행수가의 55%로 결정한 점 역시, 관행 수가에 비해 저수가로 운영하던 사설 보험 조합이 있었던 점, 특히 그 실제 대표로 청십자 보험 조합이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75%에 로 기술된 부분은 약가를 포함한 비율로 실제 의료 수가를 놓고 보면 더 적은 관행수가로 결정되었으며 전체 의료 급여에서 일부에 불과한 제검사료가 모 대학부속병원보다 높았다는 기술 역시 관의 성과 치적을 위한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기술에 불과하며, 실제 이루어지고 있는 의료 수가에 비해 전체적으로 낮은 수가를 책정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따라서, 장기려 박사와 청십자 운동의 헌신으로 이루어낸 청십자 의료보험이 수가 산출 영향에 대해 관의 위주로 서술된 문헌에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이 부분에 전혀 영향을 끼치 않았다는 주장은 상당히 비판적으로 봐야 할 부분이다. * [[일제강점기|학창시절]] 당시: 처음에는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사로서 평생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으나 실력도 모자라고 학비도 문제[* 당시 조선에 있던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등은 모두 [[구제중학교]]에 상응하는 중등교육기관이라 장기려가 갈 급이 아니었다. 장기려는 이미 구제중학교에 상응하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 혹은 [[대학예과]]를 가야 했다. 당시 일본(식민지 조선 포함)의 학제는 구제대학 [[학사과정]]에 진입하려면 이 셋 중 어디 하나라도 나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될 거면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가 아니라 중등교사를 양성하는 [[고등사범학교]]를 가야 했다. 고등사범학교도 구제고등학교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기 때문. 그러나 고등사범학교는 조선에는 없고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현 [[히로시마대학]]),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등 죄다 일본 본토에만 있었다. 이러면 유학이 되니 학비도 당연히 엄청 깨지고, 게다가 고등사범학교는 구제전문학교들보다 격이 우월하여 입결도 구제전문학교보다 훨씬 높았다.]여서 포기했고, 공학자로서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에[* 지강유철의 평전 '장기려, 그 사람'에는 "공업이 국가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여순공과대학]]에 진학하려고도 했는데 [[대학예과|예과]] 시험에서 탈락했다.[* 전술했듯 일본 제국의 [[구제대학]] 본과(학사과정)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학력으로는 바로 들어갈 수 없고 예과에 먼저 합격하여 본과로 자동 진입하거나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합격하여 입학하거나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합격하여 선과생으로 입학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예과 시험에서 미역국을 먹은 것.] 게다가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당시 조선에서 학비가 가장 적게 드는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로 진학하였다. 조선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립이다보니 당시 연 학비가 경성의전이 35원에 세브란스의전이 100원으로 세 곱절 정도여서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후 1928년 4월 1일 경성의전에 31등으로 입학하고 수석 졸업한다.[* 단, 4년 성적 평균으로 석차를 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차석이었다고 한다.] * 눈물과 정이 매우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걸인에게 적선을 한다는 것을 현금이 없다고 한 달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몽땅 주었다가 그 걸인이 수표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끌려가는 바람에 경찰서로 소환되어 해명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치료비가 없었던 환자에게 자신의 급여를 가불해 지불하기도 했고, 병원 측의 반대로 치료비 대납이 원활하지 않자 뒷문을 열어줄테니 밤에 몰래 도망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라든지, 죽을 때까지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부인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살았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제자였던 허정 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장이 증언하기를, 주변 친구들과 제자들이 재혼을 권유해도 장기려 박사는 '''"결혼은 한 번만 하는 거라네."'''라며 고사했다고 한다.] 그 외의 일화는 무수히 많지만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우니 [[평전]]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747216|'장기려, 그 사람']]을 참고하기 바란다. *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제안한 특별 상봉을 거절한 것. 누가 보아도 그만한 특혜를 받고도 남을 자격이 있는 그였으나,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며 결국 거절했다. 당시 북에서는 남한이 장기려를 납치해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장기려가 북에 가지 않으면 세계 여론이 북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정부는 거의 반강제로 장기려를 북에 보내려 했으나 이에 분노한 장기려가 "오냐, 그럼 가주겠는데 대신에 북에 가면 안 돌아올 거다."고 엄포를 놓자 경악하여 보내지 않았다.[* 사실 장기려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북에서는 장기려가 남측에 끌려갔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장기려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었던 것인데 만일 정부의 말을 듣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긴다.] *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구한 [[현봉학]]의 스승이다. 이 사람이 이산가족 관련 움직임을 보인 것이 집안도 그렇지만, 스승인 장기려도 특혜가 아닌 포괄적인 만남을 원한다는 것에서 동기였다는 발언이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영화)|국제시장]]이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이유와 [[김무성]] 대표로 불똥 튄 것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씁쓸한 일. 그리고 희대의 집단 사망사건이자 먼 훗날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에도 한발을 걸치게 된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오대양 사건]] 당시 부검을 지휘한 [[문국진]]도 제자이었기에 해상에 관련된 유명한 사건들에 연관된 제자들을 둔 셈이 되었다. *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에게서 수술을 받고 싶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진료를 했다고 한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왕진하며 다니곤 했는데 죽기 며칠 전 평소보다 일찍 사람들을 찾아가 치료하며 "올해는 못 올 것 같아 일찍 왔네"라고 했다고 한다. * [[장면]] 총리 여동생이 되는 [[장정온]] 수녀원장과의 한국전쟁 전 이북에서 인연과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 여동생이 되는 [[유순한]]과의 인연도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다른 줄기라는 의견도 있다. * 어느날 장기려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사치라곤 모르던 장기려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하길래 사람들이 대체 어디를 얼마나 가고 싶으면 저러시나 싶어서 어디를 가고 싶으시냐고 물었는데 장기려는 [[베를린#s-3.1|동베를린]]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국가이자 적성국인 [[동독]]엔 왜 가고 싶냐고 묻자 장기려 박사는 내 아들 학용이가 거기 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실제로 북에서 의사가 된 장기려의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도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동베를린에 열린 [[사회주의]]권의 의학학술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장기려가 들은 것이다. 당장 가더라도 아들을 만나긴 불가능했겠지만 아들이 밟았던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베를린의 경우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냉전 시절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터진 사건이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이다.] * 평양에서 남쪽으로 피난 올 때 원래는 버스를 타고 혼자 먼저 가고 이후에 부모와 부인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따라오기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남 장가용이 아버지의 짐을 들어주기 위해 얼떨결에 동승하게 되었고, 그것이 가족과의 이별이 되었다고 한다.[* 차남 장가용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의사가 되었고, 2008년에 사망했다. 장가용의 아들이자 장기려의 손자인 장여구 서울백병원 교수도 의사가 되어 '''3대 의사 가문'''을 이루어내었다. 나아가 장여구의 아들도 중앙대 의대에 재학 중이므로 이 아들까지 의사가 되면 '''4대'''에 걸친 의사 가문이 된다.] * 장기려와 처차남이 탄 버스가 평양을 지날 무렵 부인과 딸이 피난하는 행렬을 장기려와 차남이 목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인을 보고도 응급환자가 실린 버스를 세울 수 없어 그냥 지나치게 되었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부인을 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차남이 어머니하고 외치는 순간 50~100미터를 지나치는 바람에 더더욱 달리는 버스를 세울 수 없었고 차후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지인들 말로는 이후 남은 가족들은 평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평생 재가하지 않았다. * 끝내 상봉은 못 했지만 같이 [[월남]]한 차남 장가용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북의 아내에게 보냈는데 아내는 사진을 보더니 장기려의 사진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게 가용이구나, 아버지와 꼭 닮았어."라고 했는데 사진을 가져온 사람이 "그 분이 장기려 박사님이고 옆의 젊은이가 가용입니다."고 말해주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평양]]에서 살며 고생을 덜 하긴 했어도 그래도 홀몸으로 시부모와 5남매를 키우느라 원체 고생을 하느라 당연히 자기 남편도 자기만큼 늙었을 줄 알았고 그래서 생각보다 훨씬 덜 늙은 남편을 아들로 안 것. * 죽기 직전까지도 아내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며 아내를 그리워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경부압박질식사였다는 진실을 밝히는데 공헌한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과 중앙대병원 당직의였던 검안의 오연상은 각각 [[고려대학교]]와 [[중앙대학교]] 출신이었음에도 장기려와 인연이 있다. 황적준은 위에서 소개한 장 박사의 제자 [[문국진]]의 문하에서 부검을 배웠었다. 국과수로 가기 전 몸 담았던 [[고신대학교]] 의대에서 퇴임할 때에 기념 인터뷰에서 밝힌 점으로 보아 장기려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한 곤충법의학 전공 교수로 있는, 고신대학교 교수 문태영이 바로 문국진의 아들이다.] 또한 87년 당시 중앙대 의대에서 수학한 손자 장여구의 스승이 바로 오연상이었다. * 그가 타계하기 직전에 그의 애제자들이 장기려의 [[흉상]]을 만들어주려 했는데, 그가 분노하여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내 흉상을 만드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일갈하자 제자들이 기겁하여 주저앉았고 놀란 사진기사가 방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진정한 복음주의 [[크리스천]]이었던 장기려에게 흉상을 만든다는 건 [[십계명]]을 어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는 것. 신앙적인 면도 그렇지만 평소 겸손한 성품이었던 장기려 박사에게 자신에 대한 우상화는 절대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사후에 [[http://www.medicalilbo.com/n_news/news/view.html?no=7996&page_code=photo&photo_theme=netfu_79286_91056|흉상]]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2500209129002&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5&officeId=00020&pageNo=29&printNo=23748&publishType=00010|기어이 세워졌다]]. ~~어차피 훗날 남북통일이 되면 그의 고향에도 하나 세워질 듯하다~~ * 시장에서 바가지 씌우려는 상인들이 부르는 값보다 언제나 비싼 값을 주고 물건을 샀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박사님이 그래서 바보 소릴 듣는 겁니다. 그게 바가지 씌우는 값인줄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고 하자 "그 바가지 씌운 값을 깎으려 해봤자 그 사람들이 앞으로 바가지를 씌우지 않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올려서 주면 앞으로 겁이 나서라도 그러지 않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손양원]] 목사의 막내 아들 손동길 목사(1950 ~ )는 마취 기사이자 비서로 장기려와 함께 일하며 '장기려의 막내아들'로 불릴 정도로 장기려와 가깝게 지냈다. 다만 아버지 [[손양원]]과 장기려가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생전 독실한 [[개신교]]([[장로회]]) 신자로, [[북한]]에 있을 때부터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고, 6.25 당시 부산에 피난온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는데 앞장섰다. 휴전 이후 산정현교회 교인들 상당수는 서울로 올라가 1954년 후암동에 자리를 잡고 산정현교회의 이름으로 다시 예배를 했으나, 함께 서울로 떠나지 못하고 부산에 남은 장기려를 비롯한 산정현교회 일부 교인들은 1956년 [[부산광역시|부산]] [[중구(부산광역시)|중구]] [[부평동(부산)|부평동]]에 예배당을 짓고 산정현교회의 이름 그대로 교회를 이어 나갔다. 부산 산정현교회는 1982년 [[사하구]] [[괴정동(부산)|괴정동]]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 장기려가 설립한 복음병원이 고신대 재단에 편입되어 고신의료원이 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장기려를 [[예장고신]] 신자로 알고 있는데, 장기려는 산정현교회에서 은퇴한 후 1988년 무교회주의를 선언하고 교회를 떠났으며, 피난 직후 초량교회에 잠깐 출석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산정현교회 외의 다른 교회에 소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장기려가 출석하던 부산 산정현교회는 고신 소속이 아니라 예장 독노회(현재는 합동복구측으로 개칭) 소속이었다가 1979년 [[장로회|예장 통합]]에 가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장기려가 부산 산정현교회를 떠날 당시에는 예장 통합 소속이었다. 즉 장기려는 예장 고신이 아닌 예장 통합 소속 장로였으며, 1988년 교회를 떠난 후에는 무교회주의를 선언하고 '종들의 모임'이라는 초교파 신앙 단체에 관여, 활동하며 여생을 보냈다. * 장기려는 1959년 10월 20일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환자의 간엽절제수술을 성공했다. 대한간학회는 2000년부터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참고로 '세계 간염의 날(World Hepatitis Day)'은 7월 28일이고 이는 B형간염 바이러스와 백신을 발견하여 197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버룩 새뮤얼 블룸버그의 생일을 기념한 것이다. * 1996년 6월 21일자 KBS2 《TV인생극장》 '[[https://youtu.be/AlcRjwwkuCk|생명과 사랑]]' 편에서 그를 다뤘는데, 배우 이서우가 장기려 역을 맡았다. * 아들 장가용도 의사로 활동했으며, 손자 장여구도 중앙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인제대학교 백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장여구 교수의 아들도 2018년도 당시 의대생이었다 하니 지금은 의사로 활동할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게 되면 4대가 의사를 하고 있는 집안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