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기범 (문단 편집) == 현역 방송인 시절 == 1927년 5월 5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 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서 태어났다. [[서울공업고등학교|경성공립공업학교]],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거쳐 1948년 12월 KBS [[한국방송공사|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하였다. 그는 신입 아나운서의 몸으로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인 [[스무고개]]의 MC로 발탁되면서 일약 스타 아나운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6.25 전쟁]]이 발발하며 KBS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철수했고 장기범은 임시수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방송활동을 계속했다. 휴전 후 서울에 환도한 KBS는 전쟁과 민생고에 상처입은 민심을 달래고자 기존에 장기범이 맡고 있던 스무고개 외에 [[임택근]]을 MC로 하는 [[전국노래자랑|노래자랑]]을 신설하면서 오락 프로그램을 확대하였다. 이 두 프로는 단박에 장안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떠올랐고, 정동의 좁은 공개홀이 감당 못하는 수많은 방청객 때문에 나중엔 [[신세계백화점 본점|동화백화점]] 6층 뮤직 홀[* 1964년 12월 [[동양방송|동양TV]]가 이곳에서 개국하여 이듬해인 1965년 [[중앙일보]] [[서소문]] 통합 사옥으로 옮길 때 까지 전파를 내보낸 바 있다.]을 임대하여 공개방송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나중에는 [[나름]] 신선함을 추구하려고 노래자랑을 장기범, 스무고개를 임택근으로 MC를 맞바꾸기도 했다.] 당연히 MC를 맡고 있던 두 아나운서 또한 최고의 인기를 떠안아야 했는데 수려한 외모를 가진 임택근은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샤프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장기범은 중장년층에게 많은 호감을 샀다고 한다. 1957년에는 KBS 아나운서 실장으로 임명되어 아나운서들을 이끌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이던 1959년, 장기범은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전담 아나운서로 미국으로 약 2년간 파견 근무를 나갔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민주당(1955년)|민주당]] [[내각제]] 정부가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평소 꼿꼿한 성격의 장기범은 미국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들으면서 군인은 국가 방위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지 정치에 발을 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거사 소식을 들은 장기범은 그날 미국의 소리 뉴스에서 "박정희 장군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1961년 미국의 소리 파견을 마치고 KBS 방송과장으로 복귀한 장기범은 [[아나운서]]들에게 방송을 배당하는 임무를 맡아 이름값 보다는 실력 위주로 방송을 배당하는 파격을 행사하였다. 예를 들면 신입 아나운서에게 중요한 책무인 정오뉴스를 배당하고 당시 천하를 호령한다던 모 아나운서를 국내에선 들리지도 않는 해외뉴스 담당으로 전출시킨 것이었다. 이에 비위가 상한 모 아나운서는 공보처장을 찾아가서 "장기범 과장이 인사권을 함부로 남용하고 있다"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모함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실력도 중요하지만 연차와 직위 등 연공서열도 하나의 척도가 되는 아나운서들에게 나이가 젊다는 이유 만으로 중요한 책무를 맡기는 것은 인사권을 남용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 그 말에 공보처장은 장기범을 1966년에 [[KBS춘천방송총국|춘천방송국장]]으로 [[좌천]]시켰다.[* 그 아나운서가 당대 인기를 양분하던 [[임택근]]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임택근은 이미 1964년 [[MBC]]로 이적한 상태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 장기범 방송 인생에서의 첫 번째 시련이었다. 이후 1967년 서울 본사로 돌아와서 TV, 라디오 제작과장을 거친 장기범은 1969년 [[KBS부산방송총국|부산방송국장]]으로 좌천 당했다가 1970년 10월 KBS 보도부장[* 지금으로 치면 보도본부장이다.]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장기범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제7대 대통령 선거]]'''였다. 1971년 4월, 7대 대선을 앞두고 방송국 [[높으신 분들|윗선]]에서 여당 후보인 박정희의 유세에 모인 군중수를 상향조정 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방송으로 보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여파로 대선이 끝난 후 장기범은 [[KBS대구방송총국|대구방송국장]]으로 좌천되었고, 후배들의 전송을 받으며 대구로 떠났다. 그 후 1973년 [[한국방송공사]]가 출범하면서 장기범은 라디오국 국장으로 복귀하여 이후 방송연수원장, 방송위원, 부산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지만 대부분 한직에 불과했다. 그리고 1982년 방송심의위원을 끝으로 34년간 정들었던 방송 인생을 마감하고 정년 퇴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