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도 (문단 편집) === 관련 기록 === 언제부터 패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라]]시대 고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에서 장도 모양을 본뜬 장식칼이 순금 유물답게 그 형태가 현대까지 또렷하게 남았고, 황남대총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라고 밝혀졌으므로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이 호신용으로 소지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순금 작은고리칼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작은 칼을 제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만큼, 장도처럼 작은 칼을 패용하는 문화는 몽골 이전부터 있었음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관련 중국 사료에도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여[* 중국 사료에서는 연개소문을 당연하게도 악인으로 묘사한다. 적국의 장수이니...] 항상 칼 5자루를 차고 다니며 위엄을 과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칼 하면 떠올리는 대도 5자루가 아니라 비수 5개를 찬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연개소문 시절 고구려에서는 비수를 던지는 '비도술'이 유행했다고 한다.[* 추원교, <한국 도자공예의 발달과정 고찰-장도의 조형성을 중심으로>, 논문집 제11집, 1988. 박종군, <한국도검에 관한 연구-장도를 중심으로>, 동국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9.] 고려인들은 칼과 붓이 함께 달린 칼을 차고 다닌다는 기록[* <고려도경>, 권32, 기명.]과, 백성들에게 비수 차는것을 금했다는 기록[* <[[고려사절요]]>, 권3, 현종 5년(1014). <고려사절요>, 군4, 정종 11년(1045).]도 있으니, 장도와 유사한 칼을 소지하고 다니던 풍습이 있었던 듯하다. 단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조선]] 전기이다.[* <세종실록> 세종 1년(1419) 12월 19일.] 참고로 [[한반도]]에서 휴대용 소형칼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삼한]]시대 사용된 철제 손칼이다.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최남선]]은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전파된 [[몽골]]의 풍속이라고 주장하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 최남선, <고사통>, 삼중당, 1943. 실제로는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조선역사강화'를 대본으로 하고 증보해 단행본으로 만든 책이다. 정치 및 국제관계는 대부분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고 일본의 침략을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쪽으로 수정했다. 증보된 부분은 대부분 문화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 외에도 장도는 몽골에서 유래한 풍속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라의 유물이나 고려 시대 작은 칼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장도는 아니지만 유사한 칼이 있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장도는 몽고의 영향을 받아 고려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했다고 보았다.' 황호근, <한국장신구미술연구>, 일지사, 1976. '신라시대에 존재하던 비수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몽고식 칼이 한국에 이미 있던 비수와 결합하여 장도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김종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94호, <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21집, 문화재관리국.] [[경국대전]]에는 도자장 6명과 환도장 12명이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궁중의 장도를 제작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권6, 공전] 이는 칼을 만드는 장인이 중앙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자장은 작은 손칼을 만드는 사람, 환도장은 군용 도검을 만드는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차별과 규제가 법제화되어있었는데, 장도의 사용에도 신분상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 6조. 갓끈은 예조에서 아뢴 대로 하고, 은장도자는 단지 서민에게만 금할 것이며....[*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6월 15일(경진)] >....마류, 호박, 산호, 청금석의 입영과 은장도자는 당상관 외에 사용하는것을 일체 금하고....[* <중종실록> 중종 17년(1522) 8월 12일(을유)] 일반 서민들도 장도를 널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7세기]] [[현종(조선)|현종]] 때,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의 장도 패용을 금한 것[* <비변사등록> 29책, 현종 11년(1670) 12월 29일]을 보면 나라에서 금지해도 사람들은 계속 갖고 다녔던 것 같다. 영조 50년(1774)에는 전인 20여 명과 도자장 5~6명이 가게를 열었고[* 비변사등록 178책, 정조 15년(1791) 1월 8일.] 도자전은 장도, 은비녀, 패물, 금은가락지, 담배통 등을 팔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비고편, 한성부] 장도가 보급되면서 자연히 장식이 화려해졌는데, 주로 부녀자들이 애용한 매화연화입사, 주로 [[선비]]들이 애용한 백동입사, 그 외에도 물소뿔, 대모갑, 침향목, 흑각, 화리, 오동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오동[* 오동나무가 아니라 구리에 금, 은을 합금한 것으로, 비율은 구리가 9할 정도. 삭힌 오줌으로 검게 착색시킨다고 하여 검을 烏 자를 썼다.] 장식은 오동으로 칼집과 자루를 만들고 자루에 무늬를 새긴 것으로 왜제(倭制)라고 불렀으며, 매우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장식이다. 《[[승정원일기]]》의 '[[명나라]] 사절이 요구한 물건중 은장도의 수량을 채우지 못해 근심했다'는 기록이나, 《[[열하일기]]》에는 예단물목으로 석장도 37자루, 초도 284자루, 환도 7파, 은장도 7자루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웃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의 부녀자들이 애용하던 3대 소지품으로 [[거울]], [[빗]], 장도가 꼽혔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여인의 정절을 지키는 상징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무슨 임란 당시 자결이 아닌 공격용(?)으로 사용했으면 열녀로 선정되지 못했느니 하는데 [[http://www.nonsan.go.kr/media/html/sub04/040402.html?mode=V&no=a8bde21aa92220df6c876d37dbace245&GotoPage=1|열녀 담양국씨의 사례]]에서 보듯 전혀 아니다. 다만 열녀 칭호는 '죽음으로 정절을 지켜야' 주는 것이었으므로 자결이 더 확실히 받을 수 있었던것. [[최명길(조선)|최명길]]은 [[환향녀]][* 흔히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가 돌아온 아녀자들을 가리킨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단어. 화냥년의 어원이 아니다. [[환향녀|항목]] 참조.]를 두둔하며 하던 말이 기록에 전해진다. 정절과의 관계에서 은장도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지, 은장도 자체는 생활 도구로서 남녀 가리지 않고 다용도로 쓰던 작은 칼일 뿐이다. 따라서 자결용보다는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 사용된 예가 훨씬 더 많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현대의 [[맥가이버칼]]이나 [[커터칼]], [[가위]](하다못해 눈썹칼이나 시침가위라도) 같은 걸로 생각하면 된다. 평소에 그런 공구를 소지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 갖고 다니는 것일 리는 없고, 자살용으로 갖고 다니는 것은 더욱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수중에 그것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들고 자기방어를 시도하는 것이 당연히 자연스럽다. 전문가들도 자결용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http://m.khan.co.kr/amp/view.html?art_id=201903272049005&sec_id=990100&__twitter_impression=true|#]] 젓가락을 달아서 실용성을 높인 첨자도가 있으며, 장신구 적인 기능만 수행한 칼날이 없는 장도 벙어리 장도도 있다. 특히 벙어리 장도의 경우 장도가 자결용으로 소지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하지만 잘못 아는 사람들이 여성이 단도를 소지했다니 멋있다며 좋아하는 외국인들에게마저 은장도를 자살용으로 들고 다녔다는 오해를 퍼뜨리곤 한다(...).[* KBS에서 방송되었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용식과 이다도시가 함께 MC로 나와 거리에서 외국인들 앞에서 한국의 민속품에 대해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장도를 보고 신기한 듯 다가와서 이게 뭘까 궁금해하던 외국인들이 이용식과 이다도시 두 사람이서 마임으로 보여주는 (여성들이 남편 아닌 남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그 남자가 아닌 자신을 찌르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소개를 보고 나서 "Oh, NO!"라고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다고 여성용 호신술을 선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