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료 (문단 편집) === [[조비]] 휘하 ===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전장군으로 전임했다. 위서에 따르면 왕(조비)은 장료에게 비단 1천 필과 곡식 1만 곡을 하사했다. 봉지를 나누어 장료의 형인 장범(張汎)과 아들 한 명을 열후에 봉했다. [[손권]]이 다시 모반하자 장료를 합비에 주둔하게 하고 도향후로 올려 봉했다. 장료의 모친에게 수레와 병마를 보내 장료의 가족이 장료의 주둔지로 가는 것을 전송하게 하는 한편, 모친이 도착할 때 수행원들을 이끌고 영접하도록 명했다. 장료가 이끌던 제군의 장수와 관원들이 모두 도로변에 늘어서서 장료의 모친에게 배례했는데, 지켜보는 자들이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조비는 황제가 되자 장료를 진양후에 봉하고, 식읍을 1,000 호 늘려 예전과 합해 모두 2,600호가 되었다.[* 위군 장수들의 식읍순위로 돌아다니는 것이 있고, 이것으로 장수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ex. 삼국전투기 작가 최훈) 그래서 상대적으로 식읍순위가 최상위가 아닌 장료는 대우를 그렇게까지 좋게 받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것은 틀린 기준이다. 왜냐하면 이 식읍순위는 '''최종식읍'''이다. 따라서 정확한 비교가 힘들다. 식읍으로 장수의 공적이나 역량을 정확히 비교하려면, 오히려 '''당대식읍'''을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운동선수의 역량을 비교할 때도 통산기록보다는 시즌별 또는 대회별 기록으로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다. 217년을 기준으로 식읍서열을 정리하면, '''하후돈(2500호) 바로 다음(1600호)이다.''' 참고로 장료 다음이 조인(1500호). '''이러한 기준이면 오히려 장료는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밑에 나오는 임금의 옷을 하사하고 손을 마주잡고 임금의 음식을 먹이고 임금의 궁 옆에 두었단 것부터가 엄청난 대우다. 전근대 전제국가에서 일국의 지배자이자 지존인 황제가, 그것도 대의명분과 황제의 위엄이 중요시되던 유교가 대중적이던 시절에 일개 신하에게 이런 대우를 한단 것부터가 대단한 것이다. 물론 조비는 자신에 감정에 솔직하고 깊이가 없기 때문에 위엄은 신경 안 쓰고 그랬을 수도 있지만.] 221년, 장료는 낙양궁에서 조비를 배알했는데, 조비는 장료를 건시전으로 불러 접견하고 오를 격파할 때의 상황에 관해 친히 물었다. 답변을 듣고난 후 조비는 탄식하며 좌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 사람이 또한 옛적의 [[소호]](召虎)로구나. 장료를 위해 저택을 짓고 또한 특별히 장료의 모친을 위해 전각을 만들었으며, 장료를 수행해 오군을 격파한 보졸들을 모두 호분(虎賁)으로 삼았다. 손권이 다시 번국을 칭하자 장료는 연주 진류군 옹구현에 주둔했는데 병을 얻게 되었다. 조비는 시중 [[유엽]]을 보내 임금이나 왕족의 병을 치료하던 의원을 데리고 가 장료의 병증을 살펴보게 했는데, 그 소식을 전하는 호분(虎賁)들이 도로에 연이었다. 조비는 장료의 병이 낫지 않자 궁성 밖에 임금이 머무는 곳으로 맞아 들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친림해 장료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고, 임금의 옷을 하사하고, 음식을 담당하는 관원은 매일 임금의 음식을 보내도록 했다. 병이 다소 차도를 보이자 주둔지로 돌려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