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마당 (문단 편집) === 1990년대 [[고난의 행군]]과 장마당의 활성화 === [[김정일]]이 실세가 된 이후로 장마당은 대놓고 탄압받았다. 1974년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우던 [[김평일]]을 완전히 제치고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76년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김정일이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하기 위하여 벌인 짓이다. 1980년대 중반에 김일성의 권력을 대부분 이양받아서 국정을 운영했다. 그래도 인민의 생업을 신경쓰는 것 같은 시늉이라도 했던 [[김일성]]과 다르게 [[김정일]]은 인민들의 생업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권위와 체제를 위해서라면 국비를 낭비하는데 주저함이 없던 사람이라 민생에는 1도 도움이 되지 않는 [[류경호텔]]을 짓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같은 과시성 퍼포먼스를 벌여서 외화를 상당히 낭비했다. [[서해갑문]]과 [[순천화학련합기업소|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는 김정일이 나름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구상한 사업이나, 그 결과가 파국이었을 따름이다. 즉 [[의도는 좋았다]]에 해당한다. 다만 경제성이 없다는 내부의 수많은 반대의견을 김정일이 깔아뭉게면서 강행한 사업들이긴 하다. 즉 1980년대에 김정일은 국가를 통치할만한 식견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1989년 [[동독]]에서 베를린의 장벽이 붕괴하고, 이어서 [[동유럽 혁명]]이 퍼지자 공산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한정부가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소련]]까지 1991년에 [[소련 붕괴|붕괴]]하자, 구 소련이 헐값에 공급하는 에너지와 식량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공산권의 독자적인 경제시스템이 완전히 증발해버렸고, 북한의 경제는 자본주의 국제시장질서라는 정글에 던져졌다. 당장 소련이 국제 시세의 반의 반값에 공급하던 석유가 끊기자, 북한경제는 극심한 에너지난에 시달리면서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여기에 김정일이 1980년에 자신의 권위를 위한 삽질로 외화를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외화를 사용하여 버텨봤겠지만, 외화비축은 커녕 [[북한의 국채|국채를 남발하고 무책임하게 던지는 등]]의 삽질로 신용으로라도 외화를 빌릴 여지까지 없애버린 북한의 정부는 공산주의진영 붕괴에 의한 경제위기에 대응할 역량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김정일]]은 인민들을 돌볼생각은 커녕, 인민들을 희생하여 군사력을 확충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생각 뿐이었다.[* 사실 이렇게 된것이 당시 북한에서 그나마 잘 굴러가던 곳이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입장에서는 경제를 살릴 비책이 없던 상황에서 군대에서 제대해봐야 실업자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넘쳐날것이 뻔했고, 급여 가치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폭락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실업자들이 넘쳐나서 사회불안이 확산될게 뻔했다. 그래서 사회불안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군복무 연장을 시켜대며 군대의 규모를 키워나갔던것이었다. 이 당시에 북한에서 군대를 13년씩이나 간다해도 반발이 적었던것도 군대에 다녀오는것이 궁핍했던 당시에는 밥벌어먹는 수단이 그것밖에 없어서라는 슬픈 사정때문이었다.(...) ]소련에서 공급해줬던 천연자원(석유, 석탄 등)들이 막히자, 발전소가 멈췄고 발전소가 멈추자, 공장이 멈춰서 공업이 정지되었고[* 중화학 공업단지가 정지되어 비료생산이 정지되었다. 이는 농업생산이 무너지는데 일조한다.] 전기화 되었던 철도가 정지되어 유통이 정지되었다. 이렇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철도]]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던 북한은 철도가 멈춰 유통체계가 붕괴하자 경제가 붕괴하기도 전에 배급제가 붕괴했다. 물론 유통이 무너진 직후, 얼마안가서 경제도 파탄났다. 배급제가 유지되던 시절에는 기본 식료품과 생필품을 부족할지 언정 값싼 국정가격에 살수있고,[* 북한에서 배급제가 시행되던 시절에도 남한에서 흔히 생각하는것과는 달리 100% 무상으로 물건을 나누는 방식은 아니었다. 남한에서 상품권, 쿠폰을 가지고 와서 물건값을 할인 받듯이 상점에서 배급표를 가지고오면 물건을 할인받아 사는 방식이었다. 사실 그 시절에도 시장에서 따로 물건을 살수는 있었다. 1980년대 당시 북한의 월급이 70원이었지만, 쌀의 국정가격이 8전에 불과한데다가 곡물배급량은 1인당 연 219KG으로 지정되어있었고, 기본적인 공공요금도 무척이나 쌌었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딱히 배곪고 사는 일은 없었다.(남한도 쌀 소비량이 한창 많았을때는 1인당 쌀 소비량이 134kg이었다.) 다만 시장가가 국정가격보다 몇배 이상 비쌌기 때문에 상점에서 물건이 부족하면 곤란했을뿐이었다.] 월급수준이 낮았음에도 저축이 가능할 정도의 생활이 가능했지만, 배급이 끊어지자 비싼 시장가격에 살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마저도 암시장 환율이 매년 폭등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극빈층으로 추락하게 된것이었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1990년대 초반에는 100원 한 장이 번듯한 노동자 한달 월급이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끝나던 시기에는 100원 한장으로는 쌀 2kg도 못 사먹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현물의 여유가 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현물들을 외화로 바꾸기 위하여 장마당에 내놓기 시작했다. 국제기구를 통해서 대한민국과 서방국가들이 보낸 원조식량이 들어왔지만 그것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북한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군부가 일부를 가로챘고, 심각한 부정부패로 인해서 당/정/군의 고위 간부들이 빼돌려서 자신들의 주머니를 배불린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심각한 전력난, 유류난으로 북한의 모든 교통체계가 붕괴하면서 항구에 하역한 식량을 썩기전에 내륙지대로 운송하는게 힘들었다. 이 현상은 북한뿐 아니라 기아에 시달리는 후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1980년대 동아프리카 대기근으로 수십만이 굶어죽어갈때도 현지 항구에는 [[라이브 에이드]] 운동 등으로 서방에서 보낸 원조식량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3~40%는 운송 도중에 썩어버렸고, 4~50%는 부정부패로 도중에 사라졌다. 실제 현지인들에게 전달된 식량은 잘해봐야 10% 정도로 추정된다. 이 와중에 북중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중국에서 식료품을 밀수해왔다. 이들은 장마당을 기반으로 훗날 북한의 신흥자본가인 [[돈주]]로 성장한다. 고난의 행군으로 더이상 배급에 의존할 수 없음을 깨달은 북한 주민들에 의해 [[시장(경제)|시장]]인 장마당이 발전하고 초보적인 자본주의가 북한에서 싹튼 것이다. 결국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3월에 종합시장 상설화를 담은 「내각조치 제24호」가 발표되면서 시장은 공식적인 국가경제 일부로 편입되어 합법화되었다. [[https://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1&dicaryId=158|#]] 장마당은 '''조선로동당으로서는 눈엣가시겠지만 북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북한은 장마당을 축소하고 인민경제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하여 2009년에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경제적 피해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심까지 이반시켰는데 경제에 대한 장악력은 오히려 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