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면 (문단 편집) == 기타 == * 일제강점기 당시 사용한 창씨명은 타마오카 츠토무(玉岡勉)이다. * 후일 장면은 1966년 [[주님 부활 대축일|부활절]] 아침 [[명동성모병원]]에서 같이 입원해있는 대학생 [[정대철]]에게 자신이 38시간 동안 [[가르멜회|가르멜 봉쇄수녀원]]에 가만히 있었던 이유를 "[[박정희]] 뒤에 [[최경록]] 장군이 있고 자네 부친 [[정일형]] 박사가 있었던 걸 알았네. 그래서 무척 당황했고 나가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도 들고."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강준식 100p] * 일설에는 장면의 수행원 중 하나가 필사적으로 장면을 찾다가 [[5.16 군사정변|쿠데타]] 당일 밤에 장면을 차에 태우고 도망쳤던 운전수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수행원의 애타는 질문에도 끝까지 장면이 있는 곳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바람에 끝내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수행원들이 박정희 편에 매수되었거나 협박당해서 장면을 잡으려고 찾으러 다니는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의 운전수 및 기타 노동 등을 하는 사람은 보안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생을 살았다. 아호는 운석(雲石)이고[* 호가 태암(太巖)이었던 아버지 장기빈은 아들들에게 운석, 우석(雨石), 하석(霞石)이라고 호를 지어줬다 한다. 큰 바위의 아이들이니 돌 석 자를 붙인 것이다.], 자는 지태(志兌), [[세례명]]은 요한(John)이다. 가족으로 동생인 서양[[화가]] [[장발(1901)|장발]](張勃,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 2001년 선종)과 장극(張剋, 항공공학자, 전 [[인천대학교]] 석좌교수, 2008년 선종), 아들인 장진(張眞, 전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11년 선종), 장건(張建), [[장익(주교)|장익]] 주교([[십자가의 요한]], 전 [[천주교 춘천교구]]장, 2020년 선종), 장순(張舜), 장흥(張興) 등이 있다. * [[장기려]] 박사와 인연이 있는 여동생 장정온 악네다 수녀원장은 한국전쟁 당시 덕원수도원 소속으로 피랍되었다가 피살되어 평양에서 선종했다. 허리수술을 한지 얼마되지 않아 거동이 불편해 피신하지 못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우물 속에 생매장 된것으로 구전된다. 이 일은 장면 개인에게 가장 큰 아픔 이기도 했으며 악네다 수녀는 2022년 현재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명단에 포함되어 시복시성이 교황청에서 진행 중이다. * 영문 통용명으로 이름이 존 M. 장(John. M. Chang)이다. [[천주교]] 세례명이 '요한'이어서 이름에 요한을 영어로 읽은 'John'이 붙었고 M은 면(Myon)의 약자다. [[http://publications.americanalpineclub.org/articles/12196346100/print|미국 국무부 당국자 아서 B. 에먼스 3세 씨가 암에 걸려 별세했다는 내용의 졸기(卒記)]]와 [[http://www.trumanlibrary.org/whistlestop/study_collections/achesonmemos/view.php?documentid=67-6_11&documentYear=1950&documentVersion=both|트루먼 기념도서관이 소장한 문서 원문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면]] 주미한국대사 장면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 일설에 의하면, [[초등학생|소학생]] 시절 자신의 어린 시절 별명이 "[[짜장면]]"이었다는 [[아재개그]]를 선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짜장면은 서방 원조로 [[밀가루]]가 흔해지기 전 나름 고급 음식이라서 사람들이 잘 몰랐다는 얘기도 있다. * [[최규하]]와 친척인 최서면과 알고 지냈다. 당시에는 그의 정체를 몰랐지만. * 그가 살았던 가옥은 [[서울특별시]] [[혜화동]]에 복원되어 있다. [[대학로(서울)|대학로]] 로터리를 지나는 [[버스]]에서 이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면 '장면 총리 가옥'이라는 안내도 함께 내보낸다. *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오해를 반박하는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을 번역했다. 본인의 말로는 [[수원시|수원]]농림학교에 다닐 때 개신교인의 근거 없는 조소에 한마디도 반박 못한 것 때문에 한이 맺혀서 [[미국]] 유학 때 번역했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 당시 [[가톨릭]] 교육자로 활동한 행적이 있으며 2009년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 가톨릭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오점이 있다. [[외교관]]으로서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며 서방 국가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조속히 승인하도록 기여하였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의 신속한 참전 결정을 이끌어 내는데 공을 세웠다.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지향하였고 친미적인 인물이었던 덕분에 특히 중도 [[우파]] 진영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세련된 신사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치적인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종종 듣는다. [[김대중]]의 정치적 은사이기도 했다. * 1960년 [[4.19 혁명]] 이후 [[한국]] 헌정 사상 최초로 실시된 [[의원내각제]] 하의 2번째 행정수반 국무총리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내각의 실권을 가진 집권자였다. 그 이전에도 초대 [[주미대사]], 제2대 및 제7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제4대 [[부통령]]을 지내는 등 요직을 지냈다. 의원내각제 총리 재임 시절 성실성을 바탕으로 여러 사회,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였지만 윤보선과 갈등하는 등 집권층 내부의 분열로 인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며 급속한 지지기반의 상실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며 집권한지 1년도 안되어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하고 만다. * 1998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다만 친일 논란에 대한민국장이 건국훈장 중에서도 제일인 1등급이라서 이를 두고 그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의중이 포함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