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보고 (문단 편집) == 여담 == *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인물이 장보고다."'''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고려청자는 이름대로 고려시대에 주로 제작되었지만, 그 시작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보고]]로 대표되는 서남해 무역집단이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당나라의 도자기를 꾸준히 수입했고, 한동안은 중국 수입품으로 수요를 감당했지만 이에 자극을 받아 [[강진군]], [[부안군]] 지역 등의 가마터에서 자체제작 청자의 초기 형태인 해무리굽청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자]]와 흑유자도 소량이지만 이 시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제작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808162|기사1]][[https://www.joongang.co.kr/article/3808160|기사2]] *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에는 장보고가 활동한 재당 신라인의 중심이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다. 웨이하이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당나라 당시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고 [[무종(당)|당무종]] 시대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파괴되었다가 현대에 복원된 곳이다. * [[일본]] [[교토]] 적산선원(赤山禅院, 세키잔젠인)에 [[활]]을 든 장보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교토 중심부에서 동북 쪽으로 떨어진 사쿄 구에 있는데 교토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슈가쿠인리큐(修学院離宮) 근처에 있다. * [[일본]] [[교토]] [[시가현]] 히에이 산에는 [[엔랴쿠지]](延曆寺. 연력사)에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 비석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2002년에 [[완도군]]에서 만들어 기증한 것. 엔랴쿠지는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이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몽땅 불에 타 버린 적이 있어서 한국의 [[불국사]] 급으로 일본에서는 유명하다. * 교토 바로 옆인 일본 [[시가현]] [[오츠시]]에는 신라명신(新羅明神, 신라묘진)을 모시고 있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있다. 장보고에게 당나라 [[여행]] 중 많은 도움을 받았던 승려 [[엔닌]]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남해안을 지나던 중 바람이 불지 않아[* 범선 시대에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음은 [[사망플래그]]나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유령선]] 전설은 대부분 이것 때문에 생겼다.] 위기에 빠졌던 엔닌 일행이 현지 토지신에 빌자 곧 서풍이 불었고 이 신라 신을 일본에 돌아온 뒤 모신 것이다. 이 곳에서 모시는 [[일본의 국보]]이자 높이는 78cm 정도인 목조 신라명신좌상[* [[https://japanese.joins.com/article/885/107885.html|가끔 공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공개 유물이다.]]]은 엔닌에게 큰 도움을 줬던 장보고의 실제 모습을 본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당대의 초상이 남아있는 셈이다. *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인물 신라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新羅三郎源義光, 신라삼랑원의광)와 그의 후손인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다이묘]]인 [[다케다 신겐]] 가문이 신라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2003년 [[KBS]] <[[역사스페셜]]> 장보고 특집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요시미츠가 신라사부로라는 이름을 쓴 것은 오미 신라묘진(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렀기 때문에 붙은 것이지 요시미츠 밎 다케다 [[가문]] 자체와 한국사의 신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예를 들어 요시미츠의 큰형 요시이에는 하치만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렀기에 하치만타로, 둘째 형 요시츠나는 교토 카모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러 카모지로로 불렸다. 통칭인 신라사부로를 마치 [[성씨]]인 것처럼 해석해 일어난 일이었다. * 위의 신라사부로와 비슷한 사례로, [[전국시대(일본)]]에 [[홋카이도]] 남부를 지배한 다이묘 [[마츠마에]] 가문[* 원래 가키자키(蠣崎) 가문이었다가 5대 [[마츠마에 요시히로]] 때 마츠마에로 바꾸었다.]이 자기 가문의 역사와 가계도를 편찬한 기록물이 [[https://ja.wikipedia.org/wiki/%E6%96%B0%E7%BE%85%E4%B9%8B%E8%A8%98%E9%8C%B2|신라지기록(新羅之記録)]]이라서, 신라인의 후예가 머나먼 홋카이도까지 진출했다는 식으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이 역시 위에서 말한 신라선신당과의 인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한국사의 신라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 은근히 신라 말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충신인 [[최치원]]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신라 내에서 중앙에서 소외되었던 출신에 당나라에서 경력을 쌓아 귀국해 입지를 다진 점, 비극적인 최후 등등. 다만 문(文)적인 이미지와 무(武)적인 이미지가 확연히 갈리는 데다가 장보고는 이미 당나라에 있을때부터 나름대로 고위 장교직에까지 오르고 당, 신라, 일본에까지 명성이 천하에 널리퍼진 거물 급이었다는 점에선 확실히 차이가 있다. * [[대한민국 해군]]의 본격적인 첫 잠수함 SS-061 장보고함은 그의 함자를 따서 명명되었다.[* 그보다 이전에는 특수 임무용 소형 잠수정만이 있었다.] * 동일 규격 형식의 함종은 1번함의 이름에 따라 지칭되는 관례에 따라, 장보고함 이후 같은 모델의 잠수함들은 통틀어 "[[장보고급 잠수함]]"이라 일컫는다. 이 경우 1번함을 "네임 쉽(name ship)"이라 한다. 또한 장보고함은 대한민국의 모든 잠수함[* 이전에 있었던 [[돌고래급 잠수정]]같은 소형 잠수정 제외] 중 1번함이므로, 건조 사업 시작시 [[손원일급 잠수함]] 사업은, 장보고-II(KSS-II),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사업은 장보고-III(KSS-III) 사업으로 명명되었다. * 2014년 완공된 우리나라의 제2 [[남극]] 과학 기지의 이름도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로 결정되었다. * 청해진이 있었던 장좌리 장도는 삼국사기 제사지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름이 올라 있다. 현지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 새벽에 장도에 있는 사당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동제를 지내는데, 사당에는 원래 고려 시대 [[삼별초]]의 장수로 알려진 송징] 장군이라는 인물을 주신(主神)으로 하고 여기에 정년 장군과 혜일 대사[* 고려 시대의 승려라고 한다.]를 합사해 신령 세 위(位)를 모셨지만, 1982년부터 장보고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해 뜨기 전 새벽부터 마을 회관에 장좌리 주민들이 모여서 장도로 향하는데, 그 시간에는 장좌리와 장도 사이에 바닷물이 빠져서 뭍이 드러나 섬까지 걸어들어 갈 수 있고, 제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다시 바닷물이 차 올라 있어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어 있다. 지금은 물론 장좌리와 장도 사이에 나무 다리가 놓여 있어서 별 의미없게 되었다. 장보고를 제사하게 되면서 원래 모시던 송징이라는 인물은 거의 잊혀져 버렸고 이를 가리켜서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출처 : 윤용혁 <삼별초 - 무인정권, 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다만 장보고와 함께했던 정년은 예전부터 송징 옆에 모신 것을 보면 완도 주민들도 이미 그 전부터 장보고를 나름 의식하고는 있었던 셈. 역적으로 죽은 장보고를 버젓이 사당에 모시고 제사하기에는 그들로서도 껄끄러웠을 것이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9/2017041900007.html|#]] 설득 끝에 장도 주민들은 송징이 장보고의 별호가 아니겠느냐라고 타협하기도 했다. * 신라 하대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 한 가지 거대한 떡밥이 있는데 훗날 [[후고구려]]를 건국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789|궁예의 생모가 장보고의 딸]][* [[신무왕]] 또는 [[문성왕]]의 둘째 왕비가 될 뻔했지만 귀족 세력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기사를 끝으로 사서에서 사라진다.]이라는 것. 그 설이 사실이라면 궁예는 장보고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이 설의 요지는 바로 궁예와 장보고가 모두 궁(弓)씨로 추정되는 것에 기원한다. 이 설을 받아들일 경우 궁예가 신라에서 박해받아 도망치는 이유를 좀더 사실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헌안왕과 [[장보고의 딸]] 사이에서 궁예가 태어났지만 846년 장보고가 반역 죄목으로 염장에게 암살당한 후 가세가 기울어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궁예]]는 845년생이 된다.[* 모든 역사 기록에서 궁예의 사망 시점을 918년으로 잡고 있는데 845년생이 맞다면 73세가 되므로 그렇게 나이가 많아지는 편도 아니다.] 마침 그의 생모로 지목되는 장보고의 친딸이 [[문성왕]]의 왕비로 거론된 시점도 845년.[* 둘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문성왕의 차비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신무왕의 이복동생이었던 [[헌안왕|김의정]]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 장보고가 현대에 들어 부각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며 이들은 2가지 설을 제기한다.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는 [[삼성그룹]]이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의도적으로 장보고를 띄웠다는 설을 제기했다. 애초에 집권 [[민주공화당]]의 정치 자금을 대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손잡고 했던 밀수가 [[박정희 정부]]에 의해 뒤통수를 맞자 해상 무역과 비운의 기업인 [[이미지]]가 있는 장보고를 주목하여 장보고 기념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즉, 장보고는 삼성그룹이 의도적으로 거물로 포장시킨 인물이라는 것. 반면 [[중앙일보]]에서는 [[http://m.news.nate.com/view/20091017n00569|김대중 정부의 지지를 받아 부각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소설과 드라마 해신을 들었다. 즉, 장보고의 행적이 아래와 같이 김대중 대통령과 겹친다는 것. 강준만의 가설에 따른다면 삼성그룹은 2~3번, 중앙일보의 가설에 따른다면 김대중 정부는 1~3번을 주목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드라마 해신은 2004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 방영되었고 당시 해군 출신인 [[윤광웅]] 국방장관이 전군에 시청하도록 했으니 [[김대중 정부]]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원작 소설을 집필한 [[최인호(작가)|최인호]]는 정치적으로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작가]]로 특별히 김대중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정치]]적 목적을 가진 드라마라면 아무리 악역이라도 주요 배역인 염문 역에 당시 한나라당에서 출마까지 한 [[김을동]]의 아들 [[송일국]]을 캐스팅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 이미 1980년대, 1990년대에도 장보고는 [[위인전]]과 국사 [[교과서]]의 중요부를 당당히 차지하였으며 2000년대는 [[불멸의 이순신]] 외에도 [[후삼국시대]] 시절의 [[왕건]], [[견훤]], [[궁예]],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성왕|주몽]], [[연개소문]] 등 그동안 [[사극]]에서 잘 다루지 않던 비(非) [[조선시대]] 인물들을 [[방송국]]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던 시절이었다. 유명한 이런 사람들을 다 다룬 다음에 드라마 [[해신(드라마)|해신]]이 나왔는데 실제로 드라마가 나온 순서는 태조 왕건(2000), 해신(2004), 불멸의 이순신(2004), 주몽(2006), 연개소문(2006), 대조영(2007) 순으로 해신이 앞서 나왔다. 더구나 장엄한 사극을 원하는 방송사들에게 [[대륙]]과 [[바다]]와 [[신분]]을 실제로 넘나들었던 장보고는 스케일이나 인생 편력에서 구미가 당기는 소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